꼬는 습관

2014. 6. 18. 14:49 from 숨, 고르기.

이야기를 꼬는 습관이 있다. 이야기라기보다는 말을 꼬는 습관이라고 해야 할까.

비꼬는 것도 참 잘 하긴 하지만 꼬는 건 좀 의식적인 느낌이다.

의식적이란 건 의례적이라거나 의전적이라는 건 아니고 내 의식이 꽤 집중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의미다.


직설적인 경우도 때론 있지만 상황에 따라 골라 먹는 재미가 있기 마련.

에헤이, 그보다는 사실, 못 알아 듣게 하고 싶은 말인 경우가 많다. 암호화라고 해야 할까. 알아 들음 대박이고 아니면 땡큐고.


린킨파크 앨범이 나왔다. 넌 유죄야아아아아아아!!! 이런 직설화법은 잘 쓰지 못 하는 형편이기도 하다.

술 농도에 따라 달라지는 스스로가 마뜩잖긴 하지만.


꼬아서 못 알아 들으면 유쾌통쾌상쾌하다. 아쉬운 건 공감할 수 있는 사람도 그 만큼 없다는 거.

적지도 않다. 그냥 없다고 보는게 맞다.


그래서 가끔은 직설적이지만 다 알아 들어도 상관없을 만한 말을 하게 되기도 하는가 보다.

지적 허영의 꽃은 알아 듣게 말 해서 설득에 성공하는 거라고 생각되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래도 이런데엔 별로 소질이 없는 것 같아. 엉엉.


소질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어쩌면 대강 그 시간을 얼버무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 온 것 같다.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다, 그 감정에 휘둘리고 싶지 않다, 그건 너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니지 않은가,

네 고통을 나에게 전달 하지 말라, 나는 이곳에서 벗어날 것이다. 등등의 감정이 있겠지.


김연수는 이런걸 나와 너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있어 쉽게 넘어설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며 심연을 건너 가기를 바랐다.

엄기호는 이런걸 타인의 고통을 전혀 이해하지 못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타인의 고통 뿐만아니라 자신의 고통도 전혀 이해하지 못 하고, 그저 아파만 하는 사람.


두 사람의 진단이 다르듯 꼽는 원인도 다르다.

김연수는 심연을 인간의 본질적인 것으로, 엄기호는 교육된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해결책은 한 점에서 만나는데, 주체(the Subject)다.


타인에 대한 이해는 곧 주체에 대한 이해로 이어진다. 

나와 다른 사람, 내가 아닌 사람으로서의 타인이 아니라 부버식으로 말하자면 '나-너'와 '나-그것'이 주체다.

꼬는 습관은 '나-그것'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일테다. 나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는 너는 그것이다.

타인의 고통 따위 아랑곳 하지 않은 수 있는 이유, 나에게 타인은 '나-그것'의 관계성에 있기 때문이란 말이다.

심연을 이해했다고, 그건 타인의 취향이라며 고상한 채 거리를 두고 있는게 피곤하지 않으니까.


타인의 존재가 이질성을 가진 존재라고 할 때, 한병철의 진단은 섬뜩하다. 

오늘날의 이질성은 아무런 면역 반응도 일으키지 않는 차이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차이란, 면역학적 차원에서 말하면 '같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차이에는 격렬한 면역 반응을 일으키는 가시가 빠져 있기 때문이란다.


이질성이 없다면 '나-너'의 관계성을 통한 주체도 성립할 수 없기 마련이다.

이질성을 가진 타자에 대한 격렬한 면역 반응이 곧 관계의 지평이 열리는 방식이고

그 결과 나는 너와의 관계성 속에서 주체로 태어난다고 이해하면 좋으려나.


만약 우리 모두가 이런 관계성 속에 놓여진 존재들이라면, 우리는 결코 타자를 우롱하거나 무시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심연을 건너는 일도, 나와 타인의 고통을 이해 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자기반성은 늘 이런식으로 하게 되나 보다. 

Posted by narapar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