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하고 안 하고는 곧 '관계 맺음'을 전제한다. 

말을 함으로써 우리는 관계를 맺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을 통해 관계를 차단한다.

어느 공간에서는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를 외부세계로부터 차단하지만 또다른 공간에서는 끝도 없이 주절거리고 징징거린다.

우리는 누구와는 과잉연결되어 끝도 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상처를 호소하지만 누구와는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

이렇게 차단된 시공간에서는 표정 하나에 이르기까지 단단히 옷깃을 여미고 절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따라서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상처를 말하는 방식, 즉 누구에게 말하고 어디에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는가다.

아직 답해지지 않는 것은 '말하고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한 규칙과 그 규칙의 효과다.


- 71p.



환대와 예의바름은 비슷한 어감과는 달리 실제로 매우 다른 행동이다.

환대는 친한 사람을 적당히 대접해서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다.

환대는 낯선 이를 친구로  만드는 적극저인 과정이다.

환대하는 이는 낯선 이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의 경험을 인생의 조언과 충고로 귀하게 여긴다.

반면 이 시대의 예의바름이란 낯선 이를 친구로 만드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낯선 이가 내 삶에 다가서지 말고 낯선 이로 물러나 있을 것을 요구한다.

나 또한 남에게 관여하지 않고 거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기에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다른 이의 삶에 조언과 충고를 보태는 것은 사생활을 침범하는 무례하고 공격적인 일로 여겨진다.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것 자체가 개인을 공격하는 예의 없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 77p.




단속사회

저자
엄기호 지음
출판사
창비 | 2014-03-17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를 통해 주목 받았던 엄기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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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와 더불어 일독을 권하게 되는 책이다. 

피로사회가 이 시대의 질병을 규명했다면, 단속사회는 처방전을 써준다. 

다시 관계다. 그리고 또 다시 주체다.

주체의 성장과정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시대의 흐름이 아니라 주체의 주체성이다.

그리고 주체성의 지향점이다. 

주체의 확장과 사회의 환원 그 어디쯤, 우리가 가야할 곳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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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부 관계로서의 사랑
8장 관계의 단절과 회복
p. 250-284.
1. 인간관계 회복하기
브뤄머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교제와 협약, 그리고 조작적 관계를 분명히 구분해야 회복되어야 할 관계로의 회복을 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한 삼위일체적인 관계, 즉 몰트만식의 구원론을 이야기 한다.

2. 대속과 은총
개혁주의 신학에서 칼빈에 따르는 ‘오직은총’의 모델을 구원론에 있어서 맹점을 가진다. 그 모델은 조작적 관계의 모델로 모든 칭찬과 책임, 즉 작동자, 능동자는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3. 대속과 속상
조작적 관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설명되는 협약의 관계는 인격적이고 서로에게 각자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점에 큰 장점을 가진다. 그러나 협약의 관계는 서로의 이익을 기반으로 체결된다. 즉 뭐 좋은걸 얻을 수 있을까 하고 시작된 관계는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것과 다름없다. 게다가 이 모델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적절히 설명해내지 못한다. 

4. 대속과 하나님 사랑
브뤼머에게 있어서 인간과 하나님간의 사랑은 교제의 관계로 설명된다. 이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이며 동시에 화해의 관계이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문제는 소외된 관계, 즉 회복되어져야할 관계라는 것을 인정함으로서 가능하다. 브뤼머에 따르면 이러한 관계는 인간들 사이에서도 가능하지만 하나님은 완전하시기에 우리의 그릇된 행위를 통한 손해뿐만 아니라 그릇된 행위도 용서하실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즉 죄 그 자체마저도 용서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고백할 때 이미 그것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고백하는 행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인격을 얻으며 ‘하나님을 알게 된다.’ 이러한 교제를 통해 인간은 ‘실존의 궁극적 의미’를 가지며, 내가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질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납하시는데, 내가 거부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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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부 관계로서의 사랑
7장_관계
4. 사랑, 성, 자유, 지식
p. 137-249.
브뤼머가 생각하는 사랑은 일종의 동기를 가진다. 욕망의 대명사격인 성적 욕구도 사랑에 있어서는 동기로 기능한다. 그러나 A가 만족을 원하는 가 B라는 사람을 원하는가는 그들의 관계가 조작적 관계가 되느냐 교제의 관계가 되느냐를 좌우한다. 브뤼머는 성이 두 가지 방식으로 사랑으로 들어 올 수 있다고 말한다. 한 가지는 사랑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장하지만 성을 줄어드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관계에서 욕구는 사랑의 동기로서 작용한다. 그 후 그 욕구는 사랑으로 대체된다고 말한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욕구에서 사랑으로 대체됨으로 인해 더 이상 욕구가 사랑의 동기가 되지 않는 모습에 있다. 이 때 성적 행위는 서로를 향한 사랑의 표현이 된다. 그러나 관계에선 두 사람이 모두가 성적 행위를 사랑의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또한 브뤼머는 주장하기를 사랑의 관계에서 내가 그 관계에 불성실하게 되는 것은 내 스스로에게 불성실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이 주장을 통해 사랑의 ‘필연성’이 도출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필연성을 어떤 능력의 결핍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브뤼머에 따르면 이러한 모습은 사랑의 관계에 있는 나와 상대방이 인간으로서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지 사랑이 강제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또한 사랑의 관계가 자유로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무런 서약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종의 느낌을 통해 사랑의 동기를 얻고, 그 동기에 따라 자유로운 선택을 거쳐 사랑의 관계로 들어선다. 이 때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가지게 되며,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묶이는 것과 같이 일종의 서약을 체결한 것과 같다. 
한편 브뤼머는 사랑이 지식의 전거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브뤼머에 따르면 사랑은 오히려 지식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해 내가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지식에 반대되는 개념은 무지가 아니라 소외이며, 고립됨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브뤼머는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신뢰하는 것이며 믿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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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부 관계로서의 사랑
7장_관계
3. 협약과 교제
p. 223-237.
브뤼머에 따르면, 협약과 교제의 관계는 둘 모두 인격적 관계이다. 왜냐하면 협약과 교제는 모두 ‘두 상대자가 인격적 행위자’라고 전제하며, 그 관계를 세우고 유지하려면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상대방의 자유와 책임’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협약의 관계는 무엇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체결되며, 조약이 없으니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에 반해 교제의 관계는 상대방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으로, ‘나 자신을 당신과 동일시’ 하여 당신의 이익과 주장을 나의 것처럼 취급한다. 이러한 교제의 관계는 협약의 관계보다 네 가지의 측면에서 위험부담이 크다. 
우선 조약은 강제적이지 않기 때문에 나는 상대방을 강제하지 않고 조약에 따라 상대방을 그 자신의 책임 아래 둔다. 그러나 교제의 관계에서는 협약 관계에서 처럼 상대방의 우정이나 사랑을 살 수 없다. 둘째, 조약은 상대방의 이익을 위한 나의 ‘봉사의 가치’가 화두이지만, 교제의 관계에서는 나의 ‘인격적 가치’가 위험해진다. 왜냐하면 교제의 관계에서 나의 인격적 가치는 상대방이 나를 다른 누군가로 대체할 수 없다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나에게 ‘인격적 가치와 정체를 부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셋째, 교제의 관계는 나를 ‘인격적’으로 위험하게 만든다. 협약의 관계에서 나는 내가 앞으로 할 일을 예측할 수 있을 뿐이고 이 경우 행위의 근거는 내가 아닌 상대자에게 있다. 그러나 교제의 관계에서 나는 내가 앞으로 할 일을 결정하고 그 행동이 유지할 책임이 있다. 따라서 교제에서 내가 이 관계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하다는 결과를 낳는다. 우리가 인격의 정체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관계를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 의미로, 교제의 관계는 인간이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데에 위험성이 있다. 인간의 인격의 정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변화에 적절히 반응함으로써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교제의 관계가 변화에 어떻게 얼마나 잘 반응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과 같다. 즉 교제의 관계는 한계를 가지며 상호호혜 속에서만 가능하다. 

-> 인격의 정체는 A와 B 서로가 서로에게 대체될 수 없는 존재일 때만 가능한가? 이는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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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부 관계로서의 사랑
7장_관계
2. 인격적 관계와 비인격적 관계
p. 213-223.
브뤼머가 지적하는 조작적 관계는 근대의 주체철학에서 드러나는 맹점과 상충한다. 조작하는 자와 조작당하는 자는 주체와 대상으로 대체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는 비대칭적이며 비인격적이다. 그러나 사랑은 인격적 관계로서 대칭적 관계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계는 누군가가 세우거나 유지할 수 없다. 이러한 일은 조작적 관계의 범위를 벗어나는 현상이다. 조작적 관계에 있는 한, 그 조작자는 사르트르의 말대로 그 ‘자신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편 사랑은 상호호혜적이기 때문에, 각 상대자의 자율성을 담보로 한다. 이 자율성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한 그 자율성이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이 자율성을 보장된다. 여기서 상처받기 쉬운 쪽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인간의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비대칭적이며 따라서 비인격적 관계로 귀결된다. 브뤼머에 따르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 인간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은 하나님인가? 인간의 자율적 실존의 논리적 흐름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그저 받았기 때문에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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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부 관계로서의 사랑
7장_관계
1. 들어가는 말: 느낌, 태도, 관계
p. 205-213.
브뤼머에 따르면 사랑은 관계 개념으로 정의 될 수 있다. 사랑은 태도가 가지는 특성 세 가지(지향, 판단, 성향)를 공유하지만, ‘상호호혜를 향한 욕구’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사랑은 어떤 태도를 발생하게 하여 그것을 선택하게 하는 요소에 머무르지 않고, 각 상대자가 ‘사랑의 관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열려있는 상태 혹은 관계의 장(長) 개념으로 정의 될 수 있다. 그래서 사랑은 관계를 향한 전 단계로서의 지위를 갖는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로서 관계성을 포함한다.
이러한 일련의 논리적 흐름은 느낌이 수동적인 성격을 갖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느낌이란 수동적이며, 그 느낌을 받은 자유행위자(agent)는 그 느낌에 상응하는 태도를 결정하게 된다. 그러나 그 태도를 선택하는 것은 말 그대로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이며, 할 것이라 선택하는 순간 그것은 정책적 헌신으로 말해질 수 있다. 여기서 브뤼머는 반 드 바테의 지적에 따라 느낌과 느낌이 일으키는 정책을 구분한다. 즉 느낌은 헌신의 원인이 될 수 없으나, 느낌이 일으키는 정책은 헌신의 원인이 되며, 자유행위자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즉 자유행위자 A의 행동에 자유행위자 B가 정상적이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면, 그 반응은 A의 행동이 함의하는 정책에 동의하는 것이며, 나아가 협약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일이 일어날 때 A의 사랑은 A와 B 사이의 상호 사랑, 즉 상호호혜의 관계에서 성취된다.
따라서 이러한 모습은 A와 B가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것, 다시 말해 관계의 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된다.
 
-> 상호호혜가 가능하기 위해서 전제 조건으로 각자의 주체성, 개체성, 실체성, 실존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즉, 자유행위자이기 위한 자율성이 우선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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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야기는

2008. 12. 24. 02:18 from 숨, 고르기.
갑자기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거의 전담하다시피 번역했던 양억관의 서평이 생각났다.
나는 그의 글귀가 69라는 소설을 관통하고 있다고 느낀다.
1969년도의 일본과 비정상 체위, 그리고 비정상적인 관계를 상징하는 자극적인 제목.
어쩌면 무라카미 류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저 현실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그의 소설을 통해 본 것들은 그들의 일그러진 과거가 아니라
그들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누군가 알아봐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희미한 빛이었다.
절망 속에서 찾은 희망이라는 어쩌면 너무나 진부한 표현으로 밖에는 설명하기 힘든 이야기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포장해 놓고선 하얀 글씨로 '나 여기 있어' 라고 말하는 듯한 그런 느낌.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는 피곤할 뿐, 페스티벌과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말이다.


노골적인 대사와 묘사는 무라카미 류의 전매특허다.
현실을 어쩌면 가장 잔인하게 그려내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너의 현실과 나의 현실, 서로가 가진 깊숙한 고민을 포함한 그 현실을 말이다.
사람은 솔직해 질 수록 잔인해 진다랄까.
분명 틀린말은 아닐게다.
관계에 있어서 내가 너에게 얼마나 더 잔인해 질 수 있을까 하는 건,
어쩌면 내가 너에게 얼마나 더 솔직해 질 수 있을까 하는 것과 비례한다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얼마나 잔인했었나.
그리고 그 잔인한 출혈을 멈출 방법을 찾아내지 못해.
결국 서로를 밀어내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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