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4.12.11 시절이란 말.
  2. 2014.09.16 슬픈 말이다.
  3. 2014.06.10 기억이란게 그렇다.
  4. 2008.10.27 우리의 자유

시절이란 말.

2014. 12. 11. 10:06 from 카테고리 없음
시절이란 말을 좋아 한다.
가끔 좋아하게되는 낱말들이 있다.
시절이 그렇고 낯섦이 그렇고 삶이 그렇다.
어느땐가는 쌍받침 낱말에 빠져들기도 했다.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고,
왠지 모를 미완의 의미가 담겼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시절도 그렇다.
역시 완성되지 못한 의미가 담긴 낱말이다.
흘러가는 시절이 그렇고,
맞이하게될 시절이 그렇다.
어느 시절 하나 완성된적 없었고,
그 무엇도 완성된 시절은 오지 않는다.
쓸쓸한 말이다.

과정에 남겨진 인간이란 말은
우릴 곧잘 절망에 빠트린다.
쓸쓸하고 외롭기 때문에.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건 행운이다.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혼자가 아니고서는,
쓸쓸한 존재가 아니고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Posted by narapark :

슬픈 말이다.

2014. 9. 16. 14:16 from 숨, 고르기.

누군가에게 소용이 닿는 인간이란 어디에도 없는거야 - 무라카미류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심연이 존재합니다. - 김연수


무라카미류는 이런 슬픈 문장을 통해 인간의 자유로움을 찬양한다.

가치있는 인간의 정의를 누군가에게 소용이 닿는 인간이라고 할 때,

이 세상에 가치있는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건 비열한 생각에 지나지 않는데

그건, 인간은 누구나 대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연수는 심연을 건너려면 날개가 필요하다고 한다. 

심연을 건너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

하지만 단정하기를, 우리는 결코 날개를 가질 수 없다.

결국 우리가 타인의 마음을 알 방법 따위는 애초에 있지도 않다는 말이다.

가질 수 없는 날개는 우리를 이렇게 절망시키고 좌절시키기 위해 존재한단다.

날개가 없었다면 심연을 건널 기대도, 건널 수 없다는 좌절할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외롭기에 자유로운 것과 넘을 수 없기에 본심을 알 수 없다는 좌절감의 사이에서

어쩌면 우리는 선택을 강요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는 것이 힘인 것과 동시에 모르는 게 약이되는 것 처럼 말이다.

빨간약이냐, 파란약이냐. 뭐 그런,

한 선으로 엮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 기다리는 것. 

일이라면 일 일테고,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누군가의 소용이 닿지 않기에 나는 자유로우며

누군가에게 닿을 수 없는 한 나는 절망에 놓인다.

슬픈 말이다.



Posted by narapark :

기억이란게 그렇다. 존재를 증명해주는 유일한 도구가 되는가 하면 때론 독이되어 존재의 목을 졸라맨다.
어떤 종류의 기억이냐에 따라 갈리겠지만. 기억이란게 언제나처럼 적확하지만은 않으니까.
기억을 생성하는게 삶의 한 양태라면, 기억은 무한대로 쌓이고 그 관계성 속에서만 존재가치가 허락될 것이다.
파편화된 기억은 기억으로 인정받지 못 할 것이고 오해라거나 착각으로 치부될 수도 있을 것이다.
주어진 것 중에 최고의 것이라는 망각이 기억과 다른 맥락에서 같은 방식으로 얘기될 수 있는 이유도 이와 같다.
기억과 기억 사이를 메우는 망각은 자유를 주지만 때론 자유의 목을 딴다.
관계망 속에 들어가지 못한 자유는 이름하여 방종이므로. 망각과 망각사이에 놓은 기억은 쓸모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는 확인이 필요하다.
기억할 것과 망각할 것을 구분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어려운 문제는 타인의 기억이다.
물론 자신의 기억도 쉽게 잊거나 기억하지는 못 한다. 다만 분리 해 놓을 뿐이다.


Posted by narapark :

우리의 자유

2008. 10. 27. 05:39 from 없는, 글.


자유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오늘날처럼 개인의 권리가 존중받는 사회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본래 자유라는 말은 동양에서는 그리 좋은 뜻의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의(義)나 예(禮)와 같은 기본 덕목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저 자유라는 것은 방종과도 같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정도의 의미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양의 사상이 도입되면서 Freedom이랄지 Liberty와 같은 언어를 번역해야 하다 보니 기존에 있던 자유라는 말의 의미에 변화를 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유교의 사상인 의(義)가 접목된 현재의 자유라는 말은 책임감 있는 개인에게 보장되는 어느 정도 한정된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 불의한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 또한 자유겠지만 반대로 타인을 억압하지 못하게 작용하는 것 또한 자유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유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유는 당신을 떠나는 자유가 포함된 자유이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움직이고 자유롭게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는 말이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자유의지라는 것은 스스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해도 어떤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 한다는 것인데 나는 사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그런 자유는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는 말이다. 아니, 조금 더 생각해서 이렇게 질문해보자. ‘당신은 하나님을 떠날 생각이 있습니까?’ 이 질문은 그 ‘당신’은 이미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없다. 물론 논리적인 이야기 한에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제를 참으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은 그 처음에 내 의지, 즉 내 자유로 결정내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결정하셨고 이끌어 오신 것이지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그 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 자유의지가 침해 받은 것은 아닌가? 이번엔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자. 당신은 지금 당신이 선택했든지 안했든지 학생이다. 당신은 학생이기 때문에 당신의 자유를 침해받고 있다. 당신은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싶은데 학생이기 때문에 과제를 해야 한다던가 수업을 들어야 한다던가 말이다. 가끔은 불평도 하지만 당신은 그 놀고 싶다는 자유를 침해 받았다고 해서 학생이기를 그만두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장에 하고 싶은 것을 했을 때 얻게 되는 이익과 자유는 침해받았지만 그래도 그것을 했을 때 얻게 되는 이익을 비교해보면 후자가 훨씬 낫다는 것을 당신은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것은 사실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 그리고 당신은 더 이익이 되는 쪽으로 선택함으로 자유를 버린다. 선택이란 뭔가를 하나 고르는 것이 아니라 뭔가 하나를 버리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말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자유를 포기함으로써 자유를 얻게 된다. 둘 다 같은 자유이지만 이익의 차이에서 다른 자유가 된다. 그래서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말은 자유롭기 위해서는 또 다른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당신이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가지는 자유와 함께 있지 못할 때 가지는 자유는 어떠한가?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당신에게는 하나님을 떠날 선택의 자유가 없다. 그래서 못마땅한가?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이다. 당신의 자유가 박탈당한 만큼 아니 그것과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의 더 큰 이익을 가져다줄 자유가 당신 눈앞에 있고 당신에겐 그것을 즐길 자유가 있다.


 

Posted by narapar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