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쓰자'에 해당되는 글 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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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3.09.16 어떻게든 쓰자_005
  4. 2013.08.27 어떻게든 쓰자_004
  5. 2013.08.25 어떻게든 쓰자_003
  6. 2013.08.20 어떻게든 쓰자_002
  7. 2013.08.20 어떻게든 쓰자_001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삶이 흘러가는 것을 두고 보는 일은 일로써의 가치가 없다. 

무책임함을 의도적으로 숨기려는 수작에 불과할 뿐이다. 


잘 봐, 내가 사는 모습이 네 성에 차지 않을지 몰라도 마지막엔 

아니, 얼마 후엔 네 상상력이 전혀 닿지 못 한 걸 보게 될 테니까. 


같잖은 씨부림에 더 이상 웃음도 나지 않았다. 

이런식으로 진행되는 용원과의 만남은 끝이 좋지 않다.

둘 중 누구 하나가 정신을 잃어야만 했다.

언제나는 아니지만 용원과의 만남에서 정신을 잃는 건 희재였다. 

그게 편했다. 차라리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릴 떠들어대며

내가 이렇게 망가질 정도로 널 신뢰하고 있다고 이해되면 그만이었다.


내용이 중요했던 적은 없었다. 용원은 언제고 17년전 그 모습 그대로였다.

액면가는 좀 더 들어보였지만 막말로 생각하는 수준은 여전히 14살이었다.

누구에게나 강해보이고 싶어했고 주목받고 싶어했다.

용원은 남들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것을 좋아했다.

희재도 비슷했는데 자신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Posted by narapark :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많은 생각들을 읽다보면 나도 언제가는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를 하며 살아왔다. 고 우선 적어 둔다. 나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고 그래서 그 때부터 소설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누군가처럼 하루에 몇 권씩을 읽어 재끼거나 작법과 같은 학습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만의 첫 문장을 오래도록 기다리면서 문장들이 숨을 쉬는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만 키워왔다. 그러다 어쩌면 이런 막연한 기대와 기다림은 잘 못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래도 버릴 수 없는 어떤 욕심처럼 나만의 첫 문장을 기다리는 것은 그만 둘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느낌일까. 나는 일본 소설들처럼 눈 앞에 그려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할 만한 능력도 없거니와 대하 소설에 등장하는 여백과 치밀함을 표현해낼 자신도 없다. 아마 그래서 더욱 내 첫 문장을 기다리는 것으로 나름의 꿈을 선회시켜 안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많은 것들이 변화한다고 믿었던 것처럼 지금의 내 모습을 인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받아들이려는 노력 정도는 해볼 수 있는 것 아니냐는식의 자기 위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나는 가면을 공부했고 가면을 벗어 던지는 방법이 아니라 가면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해왔다. 애초에 가면이란 것이 개념상의 뜬구름이 아니라면 앞서 존재한 것이기 때문에 벗어 던지는 일 따위는 어디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는 네게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훈계하듯 자신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을거다. 그 언젠가는 마치 습관처럼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따위와 같은 대단해 보이지만 놀림감이 되기 딱 좋은 일들을 벌이기도 했을테니 말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더 이상 내게 매력적인 주제가 아니었고 오로지 마주함에 대한 열망만이 들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과도 과정도 중요하지 않았고 그 현상에만 집중했다. 그것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믿었고 나는 열심히 그 일에 참여 했다고 생각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적잖이 어리석은 짓이었다. 기록에서 누락된 과정과 결과, 현상에서 벗어난 관점은 나를 예상치 못한 심연으로 끌어들였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떤 꾸밈에 대해 결벽증적 태도를 보이곤 했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보여주기 위한 것에 불과하며 진실은 그 꾸밈 너머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네게 누구보다 솔직한 사람임을 증명하고 싶어했고, 나는 그 일을 꽤 잘 해냈다고 느꼈다. 그 누구도 인정해주지도 아니 애초에 관심조차 없었던 일이었지만 나는 그것이 내 일생의 과업인냥 행동했다. 분명 옳은 일이었고 좋은 일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한 그 무엇보다 자명했다. 

어느날 내 아버지가 내게 던진 한 마디의 말이 마음 한 켠에서 고개를 들었다.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괜찮다. 하지만 네 자신만은 속이지 마라. 아마 당시에 나는 이 말을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괜찮다. 하지만 네 자신에게만은 속지마라. 고 이해했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꾸밈에 대한 결벽증적 태도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너를 향해 있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에게 절대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으며, 어차피 내가 하는 일이란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는게 자연스러웠다. 나는 네게 속지 말하야 할 수동적인 입장에 선 사람이었으며 말했듯이 나는 내가 네게 얼마나 솔직한 사람인지를 매 순간 증명하려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어떤 우월감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 같다. 정신승리의 과정이었다고 말 할 수도 있겠다. 나는 어딘가에 높은 곳에 서서 이 땅을 굽어 살피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회상하면, 그땐 모두를 깔 볼 수 있었다. 모든 것이 하찮게 느껴졌고 실제로 그렇게 보였다. 나는 위대했고 모든 면에서 앞서 있었다. 나는 정말로 그랬다. 여기에는 과정도 없었고 결과도 없었다. 이에 대한 기록도 없었다. 단편 영화에서처럼 어떻게 시작됐는지 가늠하기 어려웠고 끝났을 땐 왜 끝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랬다. 나는 위대했다. 


나는, 내 취미는 사진을 찍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이다. 처음 필름 카메라를 만졌을 때 그 어느 때보다 설레었다. 나는 그 낯섦에 상기되었고 그래 이 정도면 내 취미라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나는 내게 어울리는 어떤 것을 찾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필름 카메라는 엄청난 유행이 되었고 심지어 그 구하기 힘들다는 주이코 렌즈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길을 나서면 열여 대여섯은 무슨 악세사리를 두른 것 마냥 카메라는 목에 메고 다녔고 그들 사이에는 고가의 디지털 카메라를 멘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었다. 

불편해졌다. 낯섦의 기억이 유행을 좇는 것으로 왜곡되는 것이 거북했고 참 싫었다. 자연스럽게 카메라는 먼지를 뒤집어 쓰기 일쑤였고 100일은 거뜬하게 버티는 베터리도 카메라를 사용 할 때마다 교체해야 하는 그런 상황까지도 연출되었다. 그러다보니 무심해진 것도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내 취미가 하나 사라져버리는가 싶기도 했다. 그나마 내가 쓰는 브랜드가 그 유행 대열에서도 떨어져나와 있어서 나름 다행이었다랄까.

돌아보면 너무나 유치하고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이지만 자존심의 문제일까 아무튼 그럼에도 나는 어떤 형식으로든 사진을 놓지는 않았다. 귀찮음에 사진에 대한 학습을 해본 적은 없다. 나는 그 무엇도 제대로 배워본적이 없는 것 같다. 사진도 대강 어깨너머로 익숙해졌을 뿐이다. 기계를 다루는 방식은 필요만 충족되면 어떻게든 익숙해졌다. 화각과 빛, 거리와 깊이에 대한 이야기는 강좌로 치면 한 학기로도 부족하겠지만 나는 그런건 모른다. 찍어서 이쁘고 찍어서 어울리면 그만이라. 이쁘고 어울리게 찍으면 나머지는 그 안에 다 있게 되있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새 카메라를 만났다. 


아주 먼 풍경을 바라보듯 삶을 관조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확실한건 그 만큼 나는 내 삶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것.  관조란 말은 참 멋있다. 어떻든 나는 모든 것을, 아니 적어도 내 삶에 관여된 것들 만큼은 충분히 조절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어휘들을 찾아 벽을 쌓고 자위했다. 흘러가는 시간은 어떻든 내 것이었고 텅 빈 마음도 어떻든 내 것이었다. 부정 할 수 없다. 의미를 새겨 넣는 일 따위 아무렴 어떤가 싶다가도 이내 흘러가버린, 텅 비어버린 시선을 마주할 때면 참 재미없구나 하고 슬퍼지기도 한다.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허탈함도 잠시, 어느샌가 나는 다시 무언가 되기를, 되어지기를 바란 건 아니었을까. 내가 서 있을 장소에, 정확히 그 자리에 서 있으려면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할까. 방법을 찾지 못 했다는 말로 다시금 얼굴을 가리려 하는 것일까. 어떻게든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어떻게든 무엇이든 써서 읽고 다시 읽어 누구에게든 보일 수 있는 자신감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한다. 결국 내보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어지지 않는다. 

모든 벽에는 문이 있기 마련이다. 자물쇠가 채워져 있든 아니든 문 없는 벽은 너무 슬프다. 하지만 문은 열지 않는한 벽과 다르지 않다. 벽은 넘어설 수 없는 것이며 넘어서지 말라는 경고다. 그러므로 문은 벽을 용서하는 수단. 이제는 조금이나마 쓸모 있는 어휘들로 손잡이를 만들어야겠다. 흘러가는 삶이 지루하다 말하기 전에 내 이름을 새겨 넣어야 겠다. 


알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래 이 얼마나 내뱉고 싶던 말이었던가. 꺼져 병신아. 알게 뭐람. 타인의 고통 쯤은 우리 서로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던가. 내가 네게 그렇고 네가 내게 그렇고. 그렇고 그런 사이. 우리는 우리이기 이전에 너와 나였다. 너와 나는 소리내 부르는 것 외엔 그 무엇도 닿을 수 없지 않던가. 서로를 포기하기엔 조금은 이른 시간이 아닐까 생각도 해봤지만 딱히 시간의 문제는 아니었던가 보다. 어차피 닿을 수 없는 나와 나이기에 언제고 간단한 몸짓 하나면 충분한 것이었다. 그건 그저 서로가 타인임을 확인하는 일 일뿐이므로. 


망각. 이 얼마나 손쉬운 관계이던가. 누군가 그랬다. 자신이 사진을 찍는 이유는 망각하기 위함이라고 기억하기 위함이 아닌 그 반대였다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왜 그 사람은 망각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고 말했을까. 생각해보면 답은 의외로 간단한다. 기억의 왜곡. 우리는 사실 우리의 기억들에 별로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 막연한 기대가 아무것도 가져다 주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기억은 사실 아무것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 그래서 망각이라는 말로 우리는 그렇게나 많은 것들을 포장하고 잃은 것을 잊었다고 애써 자위한다. 그건 축복이었다는 식의 의미를 부여해가면서 말이다. 

너와 내가 타인임을 확인하는 순간도 그 만큼 간단한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계획되지 않은 기억의 왜곡으로 나는 너를 내 편리에 맞춰 기억한다. 그리곤 그 뿐이다. 지금의 우리는 이런 관계에 놓여져 있다. 그것을 위한 사진은 말 그대로 망각을 위한 사진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단 하나의 프레임으로 기억되는 너. 이 얼마나 단순 명쾌한가. 이런 의미에서 사진은 도피라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견디기 힘든 기억으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도 어쩌면,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만큼 자신이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사진은 망각이라기보다는 관조다. 한 걸음 물러선 자리에 서 있고 싶은 마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사진은 동경이다. 그리고 타인이다. 어떤 작가는 이런식의 이야기를 남겼다. 피사체와 섞여들 수 있을때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들이 나를 받아 들일때 그때에야 비로소 카메라는 들었다는 식이다. 물론 무엇을 찍느냐에 따라 이런 관점은 적확한 답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런 관점은 곧 바로 폐기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바라본 누군가의 삶은 이질감을 갖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들과 동화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과 나, 라는 관계가 아니라 그들 중 하나라는 관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럴때 누군가의 삶이 나의 삶이 될 수 있다. 나의 삶을 사진으로 담으면 그 사진은 그만큼 많은 공감과 감동을 불러올 수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어설픈 동질감의 표출은 기만이다. 자기 기만일 수도 있고 더 적극적으로는 타인에 대한 기만이기도 하다. 결정적으로 나는 이 위태한 줄타기에 끼여들 생각이 없다. 나는 공감과 기만의 사이를 걷고 싶은 생각이 없다. 아무렴 어떨까 싶지만 어쩌면 여기엔 누군가의 입을 빌려 공감감의 결여라는 이유를 댈 수도 있겠다. 

물러섬, 다르게 보기, 이러한 행위가 공감감의 결여에서 온 것이라면 차라리 축복이라 생각한다. 사물의 본질을 꽤뚫자는 의미가 아니다. 지극히 단순한 의미에서의 물러섦이다. 사물의 본질 따위야 어찌되는 상관없다. 피사체는 거기 그대로 있는 것이다. 망각을 위해 사진을 찍는 사람이 기억의 왜곡을 창조한다면 관조는 있음을 기록한다. 피사체와 프레임 그리고 나, 이 어찌할 수 없는 거리감이 나를 안도하게 만든다. 부정될 수 없는 명제로 그곳에 우리가 있다. 






Posted by narapark :



알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래 이 얼마나 내뱉고 싶던 말이었던가. 꺼져 병신아. 알게 뭐람. 타인의 고통 쯤은 우리 서로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던가. 내가 네게 그렇고 네가 내게 그렇고. 그렇고 그런 사이. 우리는 우리이기 이전에 너와 나였다. 너와 나는 소리내 부르는 것 외엔 그 무엇도 닿을 수 없지 않던가. 서로를 포기하기엔 조금은 이른 시간이 아닐까 생각도 해봤지만 딱히 시간의 문제는 아니었던가 보다. 어차피 닿을 수 없는 나와 나이기에 언제고 간단한 몸짓 하나면 충분한 것이었다. 그건 그저 서로가 타인임을 확인하는 일 일뿐이므로. 



Posted by narapark :





아주 먼 풍경을 바라보듯 삶을 관조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확실한건 그 만큼 나는 내 삶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것.  관조란 말은 참 멋있다. 어떻든 나는 모든 것을, 아니 적어도 내 삶에 관여된 것들 만큼은 충분히 조절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어휘들을 찾아 벽을 쌓고 자위했다. 흘러가는 시간은 어떻든 내 것이었고 텅 빈 마음도 어떻든 내 것이었다. 부정 할 수 없다. 의미를 새겨 넣는 일 따위 아무렴 어떤가 싶다가도 이내 흘러가버린, 텅 비어버린 시선을 마주할 때면 참 재미없구나 하고 슬퍼지기도 한다.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허탈함도 잠시, 어느샌가 나는 다시 무언가 되기를, 되어지기를 바란 건 아니었을까. 내가 서 있을 장소에, 정확히 그 자리에 서 있으려면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할까. 방법을 찾지 못 했다는 말로 다시금 얼굴을 가리려 하는 것일까. 어떻게든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어떻게든 무엇이든 써서 읽고 다시 읽어 누구에게든 보일 수 있는 자신감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한다. 결국 내보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어지지 않는다. 

모든 벽에는 문이 있기 마련이다. 자물쇠가 채워져 있든 아니든 문 없는 벽은 너무 슬프다. 하지만 문은 열지 않는한 벽과 다르지 않다. 벽은 넘어설 수 없는 것이며 넘어서지 말라는 경고다. 그러므로 문은 벽을 용서하는 수단. 이제는 조금이나마 쓸모 있는 어휘들로 손잡이를 만들어야겠다. 흘러가는 삶이 지루하다 말하기 전에 내 이름을 새겨 넣어야 겠다. 


Posted by narapark :




나는, 내 취미는 사진을 찍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이다. 처음 필름 카메라를 만졌을 때 그 어느 때보다 설레었다. 나는 그 낯섦에 상기되었고 그래 이 정도면 내 취미라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나는 내게 어울리는 어떤 것을 찾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필름 카메라는 엄청난 유행이 되었고 심지어 그 구하기 힘들다는 주이코 렌즈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길을 나서면 열여 대여섯은 무슨 악세사리를 두른 것 마냥 카메라는 목에 메고 다녔고 그들 사이에는 고가의 디지털 카메라를 멘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었다. 

불편해졌다. 낯섦의 기억이 유행을 좇는 것으로 왜곡되는 것이 거북했고 참 싫었다. 자연스럽게 카메라는 먼지를 뒤집어 쓰기 일쑤였고 100일은 거뜬하게 버티는 베터리도 카메라를 사용 할 때마다 교체해야 하는 그런 상황까지도 연출되었다. 그러다보니 무심해진 것도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내 취미가 하나 사라져버리는가 싶기도 했다. 그나마 내가 쓰는 브랜드가 그 유행 대열에서도 떨어져나와 있어서 나름 다행이었다랄까.

돌아보면 너무나 유치하고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이지만 자존심의 문제일까 아무튼 그럼에도 나는 어떤 형식으로든 사진을 놓지는 않았다. 귀찮음에 사진에 대한 학습을 해본 적은 없다. 나는 그 무엇도 제대로 배워본적이 없는 것 같다. 사진도 대강 어깨너머로 익숙해졌을 뿐이다. 기계를 다루는 방식은 필요만 충족되면 어떻게든 익숙해졌다. 화각과 빛, 거리와 깊이에 대한 이야기는 강좌로 치면 한 학기로도 부족하겠지만 나는 그런건 모른다. 찍어서 이쁘고 찍어서 어울리면 그만이라. 이쁘고 어울리게 찍으면 나머지는 그 안에 다 있게 되있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새 카메라를 만났다. 


Posted by narapark :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떤 꾸밈에 대해 결벽증적 태도를 보이곤 했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보여주기 위한 것에 불과하며 진실은 그 꾸밈 너머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네게 누구보다 솔직한 사람임을 증명하고 싶어했고, 나는 그 일을 꽤 잘 해냈다고 느꼈다. 그 누구도 인정해주지도 아니 애초에 관심조차 없었던 일이었지만 나는 그것이 내 일생의 과업인냥 행동했다. 분명 옳은 일이었고 좋은 일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한 그 무엇보다 자명했다. 

어느날 내 아버지가 내게 던진 한 마디의 말이 마음 한 켠에서 고개를 들었다.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괜찮다. 하지만 네 자신만은 속이지 마라. 아마 당시에 나는 이 말을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괜찮다. 하지만 네 자신에게만은 속지마라. 고 이해했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꾸밈에 대한 결벽증적 태도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너를 향해 있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에게 절대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으며, 어차피 내가 하는 일이란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는게 자연스러웠다. 나는 네게 속지 말하야 할 수동적인 입장에 선 사람이었으며 말했듯이 나는 내가 네게 얼마나 솔직한 사람인지를 매 순간 증명하려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어떤 우월감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 같다. 정신승리의 과정이었다고 말 할 수도 있으리라. 나는 어딘가에 높은 곳에 서서 이 땅을 굽어 살피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회상하면, 그땐 모두를 깔 볼 수 있었다. 모든 것이 하찮게 느껴졌고 실제로 그렇게 보였다. 나는 위대했고 모든 면에서 앞서 있었다. 나는 정말로 그랬다. 여기에는 과정도 없었고 결과도 없었다. 이에 대한 기록도 없었다. 단편 영화에서처럼 어떻게 시작됐는지 가늠하기 어려웠고 끝났을 땐 왜 끝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랬다. 나는 위대했다. 

Posted by narapark :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많은 생각들을 읽다보면 나도 언제가는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를 하며 살아왔다. 고 우선 적어 둔다. 나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고 그래서 그 때부터 소설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누군가처럼 하루에 몇 권씩을 읽어 재끼거나 작법과 같은 학습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만의 첫 문장을 오래도록 기다리면서 문장들이 숨을 쉬는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만 키워왔다. 그러다 어쩌면 이런 막연한 기대와 기다림은 잘 못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래도 버릴 수 없는 어떤 욕심처럼 나만의 첫 문장을 기다리는 것은 그만 둘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느낌일까. 나는 일본 소설들처럼 눈 앞에 그려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할 만한 능력도 없거니와 대하 소설에 등장하는 여백과 치밀함을 표현해낼 자신도 없다. 아마 그래서 더욱 내 첫 문장을 기다리는 것으로 나름의 꿈을 선회시켜 안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많은 것들이 변화한다고 믿었던 것처럼 지금의 내 모습을 인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받아들이려는 노력 정도는 해볼 수 있는 것 아니냐는식의 자기 위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나는 가면을 공부했고 가면을 벗어 던지는 방법이 아니라 가면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해왔다. 애초에 가면이란 것이 개념상의 뜬구름이 아니라면 앞서 존재한 것이기 때문에 벗어 던지는 일 따위는 어디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는 네게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훈계하듯 자신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을거다. 그 언젠가는 마치 습관처럼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따위와 같은 대단해 보이지만 놀림감이 되기 딱 좋은 일들을 벌이기도 했을테니 말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더 이상 내게 매력적인 주제가 아니었고 오로지 마주함에 대한 열망만이 들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과도 과정도 중요하지 않았고 그 현상에만 집중했다. 그것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믿었고 나는 열심히 그 일에 참여 했다고 생각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적잖이 어리석은 짓이었다. 기록에서 누락된 과정과 결과, 현상에서 벗어난 관점은 나를 예상치 못한 심연으로 끌어들였다. 


Posted by narapar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