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됨에 대해서.

2014. 7. 24. 14:14 from 숨, 고르기.





비가 계속온다. 사진이 찍고 싶어졌다. 

카메라 챙겨 다녀야는데, 한 컷도 찍지 않고 돌아가는 날이 많아 잘 챙기지 않게 됐다.

소나기가 내릴때 어설프게 피어오르는 물 안개와 저벅저벅 걷는 우체부 아져씨가 기억에 찍혔다.


무언가를 기억하는 방식이 있다. 

나는 거의 모든 것을 사진처럼 장면으로 기억한다.

약속 장소, 시간, 모임의 이유, 사람들을 하나의 사진으로 기억한다.


가끔 아, 그런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라고 말하는 건

정말로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고 이유는 기대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대되지 않는 장면도 가끔은 그려지곤 하는데,

거기에 도달했을 때의 장면이 그려졌던 장면과 달랐으면 좋겠다고 기대한다.

대표적인게 군대였다.


내가 기억하는 것들 중 상당부분은 나의 모습이고, 행동이나 말도 포함된다.

그리고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이 나의 행동이나 말, 주변이 

나를 인식하는 타인에게 어떤 작용 하는가이다.

물론 타인에게 인식된 나의 모습도 중요하다.


눈치를 본다고 해도 좋을 것이고 내향적이다 해도 좋을 것이다.

나를 나로써 완성하는 건 단지 나만이 아니라.

내 안의 수 많은 나 더하기 타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주는 공포는 이런 것이다.

장면 기억에 기대 눈치를 보고 내향성을 가꾸는 건 이 공포에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알 수 있는건 이 공포에서 결국 벗어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몇 가지의 키워드로 설명되는 사람이다. 

굳이 자서전을 펴내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없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생각하면 슬퍼지고 만다. 공포는 이런 슬픔을 불러온다.



Posted by narapark :

잊혀질 권리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게 된다. 

구글이 무너졌다고까지 표현되는 유럽의 판결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공익을 위한 판결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잊혀질 권리는 

공익에 대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권리에 대한 것이다. 

개인의 권리가 사익와 동치될 수 있는 것인지도 애매하다. 

권리와 이익의 차이는 개념에서부터 적용까지 달라질 수 있지만 

적용에 있어서는 일정부분 공유되는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잊혀질 권리를 가진 개인이 얻는 이익은 무엇일까. 

부끄러운 과거로부터 벗어나는 건 아닐테고, 쉽게 접근하면, 

부끄러운 과거를 온전히 개인 것으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을 하나, 

얻게 되는 것일테다. 부끄러운 과거가 공개되지 않고 

개인적인 것으로만 있게 된다는 점에서 

개인의 지휘 향상 내지는 개인의 자유, 

혹은 개인 정보의 보호가 보장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으로부터의 향상이고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이며 보호일까. 


이와중에 애초에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으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이리 쉽게 말해버리기엔 어딘가 옹생한 면이 있다. 

'나도 언제가..?' 하는 걱정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과거의 행적을 반성하고 뉘우친 사람들을 생각하면 어려워진다. 

인간이란게 애초에 갱생의 여지가 없는 존재라고 한다면

뭐 답은 간단해지는 것 같기도 하지만,

우리는 적어도 뉘우침이란 걸 알고 있지 않은가. 


그게 무엇이었든 뉘우친 사람의 과거는 묻어두어야만 하는 것인가.

아니면 공표되는게 당연한 것인가. 

조금 더 세분화 하자면, 

언제든지 찾기만 하면 알 수 있도록 공개된 상태여야 하는가.

아니면 찾아도 알 수 없도록 공개 자체가 금지되어야 하는 건가.

잊혀질 권리의 적용으로 구글의 데이터가 삭제되는 건

검색조차도 해볼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구글은 게시권자를 포함해 정보의 형태에 따라 모든 데이터를 구분해서

법원의 삭제 명령을 따른다고 했다.

데이터를 구분하는 기준을 정해가고 있는 상황으로 보이는데,

그들 스스로도 이 과정이 정말 애매모호하다고 말한다.


이쯤되니 잊혀질 권리가 과연 권리로서 타당한지가 의문스러워진다.

잊혀질 권리를 보장하는 건 헌법기관일텐데.

법에 기대 타인에게 나의 과거를 잊어 달라 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다.

기록된 데이터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생기는 부작용인 걸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잊혀지는 인간의 기억과는 달리

웹상의 기록은 사라지지 않고 돌고 돌아 생판 모르는 사람도 

내 과거를 알 수 있게 되는게 자연스러우니까. 여기에서 괴리가 생기는 건가.


아니 그래도 그렇지. 웹 시대가 되기 전에는 이런 권리는 있지도 않았었지 않나.
웹 시대가 도래한 이후에야 등장한 권리인데,
인터넷 윤리 자체가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문제가 되는 건 아닌가.
윤리에서 개인의 권리를 얼마나 다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가진 자유가 애초에 의무 아래 제한되어 있는 건 분명하니까.
그만한 제한 아래 개인 권리도 보장돼야 하는게 정상일테다.

그럼 돌아가서, 웹 시대에서 우리의 의무는 뭘까.
좀 이해하기 쉽게 하자면, 이렇게 되겠다. 
'웹 사회에서의 네티즌이 가진 의무는 뭘까.' 흠. 뭐지.
인권의 입장에서 본다면, 의무를 물어보는게 참 무식한 짓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시민권의 입장에서 본다면, 조금 다르게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헌법의 보장 아래 우리나라 국민은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을 추구할 수 도 있다.
그런데 모든 국민은 동시에 납세니, 국방이니, 교육이니 하는 의무도 가지고 있지 않나.

하긴 웹 상이란게 결국 납세에 의해 걷어진 자본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니
굳이 물리적 사회와 웹상이라는 공간을 구분지을 필요는 없겠구나.
무식한 질문인게 맞구나.

어떤 사람은 "역사를 위조하는 것"이라고 하더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6082028145&code=990303)
그릇된 과거를 반박하고 넘어서는 게 아니라 
삭제하고 새로운 것으로 교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또, 하긴. 반성하고 뉘우쳤다면서 자신의 행적을 감춰버리는 사람이
정말 뉘우친 것인지도 의심해볼만은 하겠다.

그래도 가혹하긴 할 것도 같고.

아무튼 계속 생각하게 된다. 잊혀질 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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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다.

2014. 6. 19. 12:07 from 숨, 고르기.

당연한 소리를 당연한 말로 당연하게도 당연하다고 하는 말들에 대해 신물을 느낀다.

조금 더 시건방진 얘기를 하자면, 설마 그걸 이제사 알고 말하는 건 아니지? 라는 의문부터 생긴다.

그래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런 감정은 말들에 느끼는게 아니라

그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느끼는 실망감이며 허탈함이고 부끄러움이다.


그 나물에 그 밥, 도 긴 개 긴, 오십보 백보. 그 중의 제일은 그 나물에 그 밥이니,

한데 어울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마냥 이도저도 아닌 모양.

다자키 쓰쿠루야 순례를 떠났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하마터면, 까지 쓰고 보니, 나도 참 못 났구나 싶다.

쓰쿠루가 순례를 떠나면서 찾게되는 것들,

자신의 색을 결국에는 이제사 알게된 것들이니까.

무언가 있다. 라는 의식이 이전부터 있었던지 없었던지 간에 

여기서 중요한건 이제사 발견하게 되었다라는 시간상의 맥락 아닌가.

그렇다고 하면, 이제사 알고 말하는 건 아니지? 라는 의문은 

공교롭게도 그게 무슨 문제냐는 말에 걸려 넘어지고 말기 때문이다.


당연한 듯 내뱉기는 나도 마찬가지구나. 췟. 신물이 난다.

Posted by narapark :

꼬는 습관

2014. 6. 18. 14:49 from 숨, 고르기.

이야기를 꼬는 습관이 있다. 이야기라기보다는 말을 꼬는 습관이라고 해야 할까.

비꼬는 것도 참 잘 하긴 하지만 꼬는 건 좀 의식적인 느낌이다.

의식적이란 건 의례적이라거나 의전적이라는 건 아니고 내 의식이 꽤 집중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의미다.


직설적인 경우도 때론 있지만 상황에 따라 골라 먹는 재미가 있기 마련.

에헤이, 그보다는 사실, 못 알아 듣게 하고 싶은 말인 경우가 많다. 암호화라고 해야 할까. 알아 들음 대박이고 아니면 땡큐고.


린킨파크 앨범이 나왔다. 넌 유죄야아아아아아아!!! 이런 직설화법은 잘 쓰지 못 하는 형편이기도 하다.

술 농도에 따라 달라지는 스스로가 마뜩잖긴 하지만.


꼬아서 못 알아 들으면 유쾌통쾌상쾌하다. 아쉬운 건 공감할 수 있는 사람도 그 만큼 없다는 거.

적지도 않다. 그냥 없다고 보는게 맞다.


그래서 가끔은 직설적이지만 다 알아 들어도 상관없을 만한 말을 하게 되기도 하는가 보다.

지적 허영의 꽃은 알아 듣게 말 해서 설득에 성공하는 거라고 생각되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래도 이런데엔 별로 소질이 없는 것 같아. 엉엉.


소질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어쩌면 대강 그 시간을 얼버무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 온 것 같다.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다, 그 감정에 휘둘리고 싶지 않다, 그건 너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니지 않은가,

네 고통을 나에게 전달 하지 말라, 나는 이곳에서 벗어날 것이다. 등등의 감정이 있겠지.


김연수는 이런걸 나와 너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있어 쉽게 넘어설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며 심연을 건너 가기를 바랐다.

엄기호는 이런걸 타인의 고통을 전혀 이해하지 못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타인의 고통 뿐만아니라 자신의 고통도 전혀 이해하지 못 하고, 그저 아파만 하는 사람.


두 사람의 진단이 다르듯 꼽는 원인도 다르다.

김연수는 심연을 인간의 본질적인 것으로, 엄기호는 교육된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해결책은 한 점에서 만나는데, 주체(the Subject)다.


타인에 대한 이해는 곧 주체에 대한 이해로 이어진다. 

나와 다른 사람, 내가 아닌 사람으로서의 타인이 아니라 부버식으로 말하자면 '나-너'와 '나-그것'이 주체다.

꼬는 습관은 '나-그것'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일테다. 나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는 너는 그것이다.

타인의 고통 따위 아랑곳 하지 않은 수 있는 이유, 나에게 타인은 '나-그것'의 관계성에 있기 때문이란 말이다.

심연을 이해했다고, 그건 타인의 취향이라며 고상한 채 거리를 두고 있는게 피곤하지 않으니까.


타인의 존재가 이질성을 가진 존재라고 할 때, 한병철의 진단은 섬뜩하다. 

오늘날의 이질성은 아무런 면역 반응도 일으키지 않는 차이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차이란, 면역학적 차원에서 말하면 '같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차이에는 격렬한 면역 반응을 일으키는 가시가 빠져 있기 때문이란다.


이질성이 없다면 '나-너'의 관계성을 통한 주체도 성립할 수 없기 마련이다.

이질성을 가진 타자에 대한 격렬한 면역 반응이 곧 관계의 지평이 열리는 방식이고

그 결과 나는 너와의 관계성 속에서 주체로 태어난다고 이해하면 좋으려나.


만약 우리 모두가 이런 관계성 속에 놓여진 존재들이라면, 우리는 결코 타자를 우롱하거나 무시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심연을 건너는 일도, 나와 타인의 고통을 이해 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자기반성은 늘 이런식으로 하게 되나 보다. 

Posted by narapark :

귀찮긴 하지만.

2014. 6. 17. 11:43 from 숨, 고르기.

귀찮긴 하지만 출근하자마자 신나게 전화돌리고 서류 작성하고 한 켠에 쌓아둔 후 

잠깐 책상을 둘러보며 내쉬는 한 숨이 참 게운하다.


귀찮긴 하지만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연락오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고나면

잠깐이긴 하지만 내가 그래도 쓸모없는 인간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좋다.


그래도 역시 귀찮긴 하지만.


그러고보니 어떤 글을 쓸 때, 

특히 사변이나 신변잡기의 글을 쓸 때, 나는 제목 짓기를 어려워 한다.

딱히 주제가 있는 글이 아니기도 하지만

제목을 정하고 쓰기 시작하면 어딘가 답답해오기 때문이라고 쓰다보니

잘 모르겠어졌다.

그냥 뭐, 글에 대한 열망보다 배설 욕구가 더 강한게 아닌가하고 갈무리할 뿐.


사실, 글을 쓴다는 것과 글을 읽는다는 건 참 귀찮은 일이다.

문장 구조가 망가지지 않게 신경쓰다보면 

어떨땐 한 문장도 제대로 적지 못 하기도 한다.

온전한 문장을 쓰자,고 생각할 수록 더 어려워지기 마련인데,

단어와 단어의 느낌이나 분위기, 억지스러운 번역투 문장에 이르기까지

하나 하나 신경 쓰다보면 정작 내가 그 문장에 담고 싶었던 감각을 놓치기 일쑤다.


그래서 장문에 익숙해지지 못하고 단문에만 메달리게 되는데,

단문이라고 하면 조금더 깊이가 있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된다.

아, 이러다 평생 제대로된 노트하나도 못 만들지 싶어 괜히 짜증이 일기도 한다.


참, 귀찮은 일이다. 이것 저것 신경써야만 하는 건 성격 탓인지

원래 그 정도 고뇌(?)는 거쳐야만 하는 일이라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뭐, 어쨌든 하얀 종이 위에 얹여진 문장들을 보면 뿌듯하다.

그래서 이거봐!라며 링크를 걸어 두는 게 아닐까. 소소한 기쁨이랄까.

이러니 그냥 관심병자 인가보다 하고 누군가 생각한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다.

그게 뭐 어때서란 뻔뻔함도 나이만큼은 생긴 것 같기도 하고.


귀찮긴 하지만,

Posted by narapark :
예상을 해 보자면, 어쩌면 오래 가지 못 할 수도 있다.
되려 오래가지 않는게 더 좋은 일 일지도 모른다.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세상이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그대로 일 것이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하지만, 원래 예상이라는게 그렇듯 온전히 그 결과가 드러나는 것도 아니기도 하니까
예상을 해 보자면이란 말은 정말 별 뜻 없이 지껄이는 것에 불과하기도 할 것이다.

큰 문제가 없다면 우리는 여름을 맞게 될 것이고.
그 여름 이후에는 가을이 그리고 곧 겨울을 맞게 될 것이다.
그러고 나면 새해가 시작되고 또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일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 하루 하루 만큼 나이가 들 것이고
그 만큼 어른이 되어 갈 것이다.

큰 일이 없는 한 우리는 여전히 우리 일 것이다.
별 탈이 없는 한 우리는 같이 늙어 갈 것이다.
큰 일이나, 별 탈이 생기기 위해서는 우리 중 누군가는
지금의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기대하게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야기한 세계 안에서 살아가기를 약속하고
그 세계를 완성시키기 위한 걸음을 멈추지 않는 한 결과는 여전히 다음에 있으며,
지금은 예상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기대도 여전히 다음의 무엇이 될 것이다.

삶에 감사하고 관계에 지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우리 사이에 놓여 있으며
그 어딘가에는 서로를 향해 놓여있는 믿음도 있을 것이다.
관계란 어떤 결정체가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 놓인 것.
우리란 어떤 결과물이 아니라 너와 내가 맞잡고 있는 것.
이상의 무엇을 우리가 잊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우리 일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이 흘러가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것을 붙잡기 위해 집착하지도 않을 것이다.
흘러가는 것을 거스르지 않을 것이고
거스르기 위한 애씀도 하지 않을 것이다.
감사만을 바라지 않을 것, 안녕만을 바라지 않을 것과
참회만을, 반성만을 바라지도 않을 것을 약속한다.
홀로서기를 그만 두지 않을 것이고, 그 바람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감정의 과잉과 이성의 천착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과
어딘지 모를 중도을 넘나들 때엔 한 걸음 물러서야 한다는 것을 알고
물러섬이 곧 패배나 실패가 결코 아님을,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려 노력할 것이지만 설령 결과가 참혹하여 속이게 된다면
맥락을 자르지 않고 사실과 진실에 대해 납득 할 수 있는 언어로
이야기 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설명될 수 없는 일은 우리의 세계엔 없을 것이고.
말은 폭력이 아닌 다가섬의 유일한 도구로 기능할 것이다.


감사와 사랑을 담아 5주년을 축하하며
Posted by narapark :

기억이란게 그렇다. 존재를 증명해주는 유일한 도구가 되는가 하면 때론 독이되어 존재의 목을 졸라맨다.
어떤 종류의 기억이냐에 따라 갈리겠지만. 기억이란게 언제나처럼 적확하지만은 않으니까.
기억을 생성하는게 삶의 한 양태라면, 기억은 무한대로 쌓이고 그 관계성 속에서만 존재가치가 허락될 것이다.
파편화된 기억은 기억으로 인정받지 못 할 것이고 오해라거나 착각으로 치부될 수도 있을 것이다.
주어진 것 중에 최고의 것이라는 망각이 기억과 다른 맥락에서 같은 방식으로 얘기될 수 있는 이유도 이와 같다.
기억과 기억 사이를 메우는 망각은 자유를 주지만 때론 자유의 목을 딴다.
관계망 속에 들어가지 못한 자유는 이름하여 방종이므로. 망각과 망각사이에 놓은 기억은 쓸모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는 확인이 필요하다.
기억할 것과 망각할 것을 구분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어려운 문제는 타인의 기억이다.
물론 자신의 기억도 쉽게 잊거나 기억하지는 못 한다. 다만 분리 해 놓을 뿐이다.


Posted by narapark :

일을 하면서 느끼는 것 중에 하나, 스트레스는 업무량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업무량이 적건 많건 간에 스트레스 받는 건 매한가지다.


사실, 업무량이 주는 스트레스는 그리 크지 않다.

스트레스의 원인들 중 가장 큰 스트레스는 주는 건 

감정을 드러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에 있다.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생활을 하게 되면 

분명 문제가 생기고 마는데, 그 문제란게 너무나 개인적이라 

어디가서 하소연 하기도 참 우습다.


문득 떠오른 문장을 적고 보니  

너무 유치해서 지워버릴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할까.


생각을 비우게 된다는 감각이 있다.

영화를 볼 때, 소설을 읽을 때, 음악을 들을 때, 작품을 볼 때.

그려지는 영상과 느껴지는 음율에 기대어 나름의 몰입을 하게 되는 순간.

나는 이 모든 활동이 소비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내가 본 영화는 사라지지 않고, 내가 읽은 소설도 사라지지 않지만

영화보고 소설을 읽는 동안 만큼 내가 가진 시간이 사라질뿐이다.


그래, 생각을 비우게 된다는 감각은 이런 느낌이다.

일정한 시간 동안 무언가를 하지만, 

돌아서보면 없어진 시간만 남겨져 있는 걸 보게 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노력을 하다보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다보면, 어지간한 감정에 무감해지고

무감해지다 보니 드러날 감정이 없어지기도 하나보다.


나는 기억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다.

메모 해둔 수첩을 잃어버리고, 메모 했다는 사실을 잊고.

나는 많은 걸 새롭게 시작했다.


Posted by narapark :

피로하다.

2014. 4. 2. 15:30 from 숨, 고르기.

모든 사람들 전부를 끌고가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함께 하는 것이 누군가에겐 분명 부담일 수 있으며,

혹 누군가에게는 귀찮거나 그저 불편한 일 일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솔직하지 못한 감정들 때문에

모든 사람들 전부를 끌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집단이든 개인의 희생은 필요하다.

무엇이든지간에 그 어떤 희생도 없는 집단은 구성 자체가 어렵다.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집단의 경우는 이야기가 빠르다.

발생한 이윤의 일정 부분을 분배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윤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친목 집단에서 발생한다.

몇 몇의 희생은 희생으로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이윤이 없으니 보상도 없다.

그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것 말고는 어떤 말도 사실 의미는 없다.


모든 일에는 절차가 있고, 순서가 있는 법이다.

일들의 순서와 일의 절차를 알고 진행하는 자는 누구인가.

반드시 누군가가 일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피로한 일이다.


내가 왜, 라는 생각의 기저에는 불필요한 곳에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깔려있고,

불필요한 곳이라 인식하는 것은 나완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그 무엇 하나 남을 것 같지도 않은 일이기 때문에 꺼려지는 것이라 짐작한다.

뭐 당신이나 나나 "돈도 안 되는 일에 무슨?" 같은 마음이겠지. 

이건 참 슬픈 일이긴 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싶은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강요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 일을 위한 당신의 희생은 희생이라 여겨지지도 않을 것이며,

그에 따른 보상은 당연히 없을 것이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 그뿐이다.


Posted by narapark :

삭제된 이야기.

2014. 2. 21. 16:55 from 숨, 고르기.

좋은 삶을 고민할 때, 나는 말 하고 싶지 않았던 부분이 있었다. 

의도적으로 삭제된 개념. 바로 '보다 나은 삶'에 대한 이야기다. 

불편한 이야기다. '좋은 삶'이 아니라 '보다 나은 삶'이라니.


돌이켜보면 '좋은 삶'을 말 할 때, 내가 하고 싶던 이야기는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결정된 결론에 닿을 수밖에 없는 삶이 아닌, 만들어갈 수 있는 혹은 변화시킬 수 있는 삶, 그런 이야기.

진부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겠지만 어쩔 수 없다. 이야기로만 끝나버리게 내버려 둘 수 없다.


삶이란 명사적 의미로서 다뤄질 것이 아니라 동사적 의미로서 다뤄질 때 그 빛을 발한다. 

살아온 날들이 살아갈 날들에 의해 변화할 가능성을 가진 삶은 명사로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시작되었고,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삶'. 

결국 그 무엇도 결정되어있지 않고, 무엇을 하든 어떻게든 변화할 수 있는 그런 '삶'


때문에 '좋은 삶'에 선행하는 '삶' 이란. 충분한 아니, 넘치는 가능성의 토대에 놓여야만 한다.

너의 삶과 나의 삶이 비교될 수 없는, '보다 나은 삶'의 지평에서 이야기될 수 없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삶'이 가능성의 토대에 놓일 때, 너의 삶과 나의 삶은 비교 대상이 아니라 '마주보는 삶'이 될 수 있다.


마주보는 삶은 불완전함을 완전함으로 이끈다. 

단절된 존재, 유한의 존재인 객체로서의 인간을 연결된 존재, 무한의 존재인 주체로서의 인간으로 이끈다.

비로서 인간은 주체로서의 자신만의 삶을 살아 갈 수 있으며, 종국에는 죽음마저도 반길 수 있게 된다. 

이게 바로 '좋은 삶'이 가진 가능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은 취업이 꿈이 되고, 부자되는 것이 덕담이 되어버린 이 미친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좋은 삶'보다 '보다 나은 삶'이 더 현실감 있게 들릴 수 있다.

생존을 위한 삶은 경쟁할 수밖에 없는 구조 안에 놓인다. 그것이 타인이든 어떤 조직이든 마찬가지다.

이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의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생존은 쟁취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 '좋은 삶'은 찾아 볼 수 없다. 끝임없이 비교될 뿐이다. 


분명한건 삶이 생존에 기대어 있긴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취업이 꿈이된 삶이란, 생존이 꿈이 된 삶과 다름없다. 

이는 자신의 색이 아니라 기성화된 색을 입히는 행위로써

말하지면 삶의 한 도구인 취업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에 불과하다. 


나는 다만, 나는 살아남고 싶은게 아니라 살아있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너의 삶을 마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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