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프레임을 좋아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냥 익숙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사라져가는 많은 것들 중 하나이기도 하고.
4:3 프레임을 좋아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냥 익숙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사라져가는 많은 것들 중 하나이기도 하고.
꿈을 꾼다고 한다면,
마치 새로운 무언가를 생각해내야만 할 것 같은 강박에 빠진다.
서재를 가지고 싶다거나, 시골에 살고 싶다거나, 카페를 차리고 싶다거나
이런 바람들은 꿈이 아닌듯 혹은 너무 큰 일인 듯 점잖게 밀려난다.
현실로부터 망상의 세계로 더 이상은 아무것도 아닌채로.
내가 바랐던 세계가 아닌 곳에 살아가야 한다는 건
고통스럽기 보다는 그저 무기력해져 가는 자신을
어찌할 수 없음에 쓰러져가는 것과 같다.
살아남기 위함이 아니라 살아가기 위한 삶이라면
꿈이란 바랐던 세계를 계속 바라는 걸까.
친절한 속삭임 뒤에는 언젠가는 끝난다는 기대가 실렸을 수도.
결국은 끝나고 말 일이라는 뒷짐진 생각이
어찌할 수 없음에 동의하고 의지하는건 또 아닐까.
시간은 간다. 사라져버린다. 바랐던 세계가
다시 저 만치 밀려난다. 꿈을 꾼다고 한다면,
달려가 간격을 좁혀야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럴땐 차라리 고통이라면..
너희들은 무슨 꿈을 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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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고 싶은 일은 어쩌면 아무것도 없을 지도 모른다. 오늘 하루 시간이 흐르는 것을 지켜 보면서 나는 아무것도 내게 즐겁지 않음을 알았다. 막상 글을 써보려 할 때면 피로가 몰려오고 이제 다잡고 책을 펴 읽으려 할 때면 몸이 이미 지쳐왔다. 밥을 먹는 다는 행위에서 나는 나를 경멸하게 되었고 나는 이유도 목적도 찾을 수 없는 오늘 하루를 너무 쉽게 흘려 버렸다. 어째서 일까, 꿈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저 작은 바램일 뿐, 신념따윈 내게 존재 하지 않는 것일까. 돌아보면 항상 그래왔다. 용케 오늘까지 왔다만 어떻게 오늘까지 올 수 있었을까..
남보다 특별한 무엇이 있다면, 아마 모든걸 그 무엇 따위로 생각하는 능력이랄까. 분명 너와 내가 있지만 나에게 너는 나를 위한 너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우리가 우리된다는 것 마저도 나를 위한 우리가 있을 뿐 다른 의미는 없다. 지독한, 이토록 철저한 이기심은 내가 이렇게 타이핑을 하는 순간에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저 이렇게 바라 볼 뿐, 변화란 내게 없는 말이다.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 하려면 그 삶의 이유와 목적이 있어야 할테고, 똑바로 살려면 똑바른 삶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테다. 그러나 내가 아는 건 없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겉 모습을 치장하고 속내를 감추며 왜곡하는 삶은 결코 그 끝이 아름답지 못 할 것이다. 내 삶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마 의심의 여지없이 그 아름답지 못한 구석일테다. 이대로 가다간, ...
그렇다면 삶의 괘도를 옳바른 곳으로 옮기고 곧장 달리면 될테다. 하지만 문제는, 왜. 그리고 어떻게.
왜라는 질문엔 어떻게든 대답 할 수 있다. 지금이 틀렸으니까 라는 단순한 대답으로도 그 이유는 충분하다. 지금이 왜 틀렸느냐고 한 번 더 물어온다면 자, 나의 오늘 하루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라는 물음은 글쎄.. 당장 그 답을 꺼내 놓기엔 내가 너무 어리석다.
어쩌면 나는 내 삶에 너무 많은 것, 내가 할 수 있는 능력 밖의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숭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데 나는 육식을 하려 덤비려 하는 건 아닐까. 밑도 끝도 없는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스스로를 할 수도 없는 일에 몰아 넣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옳다고 생각한 이 괘도가 어쩌면 사실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괘도이지는 않을까. 그럼 어쩌지..
오늘 하루를 지내면서 그리고 내가 흘려버린 시간들을 읽어가면서 나는 이런 생각에 빠졌다. 하루 하루 시간이 지나가고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제는 서른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불안해진 걸까. 이제와서 겁이 나는 걸까. 나는 또 왜 이런 생각으로 시간을 흘려버리고 있는 걸까.
바람이 차다. 준비가 덜 되었는지 온 몸이 떨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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