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란게 그렇다. 존재를 증명해주는 유일한 도구가 되는가 하면 때론 독이되어 존재의 목을 졸라맨다.
어떤 종류의 기억이냐에 따라 갈리겠지만. 기억이란게 언제나처럼 적확하지만은 않으니까.
기억을 생성하는게 삶의 한 양태라면, 기억은 무한대로 쌓이고 그 관계성 속에서만 존재가치가 허락될 것이다.
파편화된 기억은 기억으로 인정받지 못 할 것이고 오해라거나 착각으로 치부될 수도 있을 것이다.
주어진 것 중에 최고의 것이라는 망각이 기억과 다른 맥락에서 같은 방식으로 얘기될 수 있는 이유도 이와 같다.
기억과 기억 사이를 메우는 망각은 자유를 주지만 때론 자유의 목을 딴다.
관계망 속에 들어가지 못한 자유는 이름하여 방종이므로. 망각과 망각사이에 놓은 기억은 쓸모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는 확인이 필요하다.
기억할 것과 망각할 것을 구분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어려운 문제는 타인의 기억이다.
물론 자신의 기억도 쉽게 잊거나 기억하지는 못 한다. 다만 분리 해 놓을 뿐이다.


Posted by narapark :

일을 하면서 느끼는 것 중에 하나, 스트레스는 업무량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업무량이 적건 많건 간에 스트레스 받는 건 매한가지다.


사실, 업무량이 주는 스트레스는 그리 크지 않다.

스트레스의 원인들 중 가장 큰 스트레스는 주는 건 

감정을 드러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에 있다.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생활을 하게 되면 

분명 문제가 생기고 마는데, 그 문제란게 너무나 개인적이라 

어디가서 하소연 하기도 참 우습다.


문득 떠오른 문장을 적고 보니  

너무 유치해서 지워버릴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할까.


생각을 비우게 된다는 감각이 있다.

영화를 볼 때, 소설을 읽을 때, 음악을 들을 때, 작품을 볼 때.

그려지는 영상과 느껴지는 음율에 기대어 나름의 몰입을 하게 되는 순간.

나는 이 모든 활동이 소비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내가 본 영화는 사라지지 않고, 내가 읽은 소설도 사라지지 않지만

영화보고 소설을 읽는 동안 만큼 내가 가진 시간이 사라질뿐이다.


그래, 생각을 비우게 된다는 감각은 이런 느낌이다.

일정한 시간 동안 무언가를 하지만, 

돌아서보면 없어진 시간만 남겨져 있는 걸 보게 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노력을 하다보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다보면, 어지간한 감정에 무감해지고

무감해지다 보니 드러날 감정이 없어지기도 하나보다.


나는 기억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다.

메모 해둔 수첩을 잃어버리고, 메모 했다는 사실을 잊고.

나는 많은 걸 새롭게 시작했다.


Posted by narapark :





말을 하고 안 하고는 곧 '관계 맺음'을 전제한다. 

말을 함으로써 우리는 관계를 맺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을 통해 관계를 차단한다.

어느 공간에서는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를 외부세계로부터 차단하지만 또다른 공간에서는 끝도 없이 주절거리고 징징거린다.

우리는 누구와는 과잉연결되어 끝도 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상처를 호소하지만 누구와는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

이렇게 차단된 시공간에서는 표정 하나에 이르기까지 단단히 옷깃을 여미고 절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따라서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상처를 말하는 방식, 즉 누구에게 말하고 어디에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는가다.

아직 답해지지 않는 것은 '말하고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한 규칙과 그 규칙의 효과다.


- 71p.



환대와 예의바름은 비슷한 어감과는 달리 실제로 매우 다른 행동이다.

환대는 친한 사람을 적당히 대접해서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다.

환대는 낯선 이를 친구로  만드는 적극저인 과정이다.

환대하는 이는 낯선 이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의 경험을 인생의 조언과 충고로 귀하게 여긴다.

반면 이 시대의 예의바름이란 낯선 이를 친구로 만드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낯선 이가 내 삶에 다가서지 말고 낯선 이로 물러나 있을 것을 요구한다.

나 또한 남에게 관여하지 않고 거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기에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다른 이의 삶에 조언과 충고를 보태는 것은 사생활을 침범하는 무례하고 공격적인 일로 여겨진다.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것 자체가 개인을 공격하는 예의 없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 77p.




단속사회

저자
엄기호 지음
출판사
창비 | 2014-03-17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를 통해 주목 받았던 엄기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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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와 더불어 일독을 권하게 되는 책이다. 

피로사회가 이 시대의 질병을 규명했다면, 단속사회는 처방전을 써준다. 

다시 관계다. 그리고 또 다시 주체다.

주체의 성장과정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시대의 흐름이 아니라 주체의 주체성이다.

그리고 주체성의 지향점이다. 

주체의 확장과 사회의 환원 그 어디쯤, 우리가 가야할 곳이 있다.



Posted by narapark :

피로하다.

2014. 4. 2. 15:30 from 숨, 고르기.

모든 사람들 전부를 끌고가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함께 하는 것이 누군가에겐 분명 부담일 수 있으며,

혹 누군가에게는 귀찮거나 그저 불편한 일 일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솔직하지 못한 감정들 때문에

모든 사람들 전부를 끌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집단이든 개인의 희생은 필요하다.

무엇이든지간에 그 어떤 희생도 없는 집단은 구성 자체가 어렵다.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집단의 경우는 이야기가 빠르다.

발생한 이윤의 일정 부분을 분배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윤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친목 집단에서 발생한다.

몇 몇의 희생은 희생으로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이윤이 없으니 보상도 없다.

그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것 말고는 어떤 말도 사실 의미는 없다.


모든 일에는 절차가 있고, 순서가 있는 법이다.

일들의 순서와 일의 절차를 알고 진행하는 자는 누구인가.

반드시 누군가가 일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피로한 일이다.


내가 왜, 라는 생각의 기저에는 불필요한 곳에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깔려있고,

불필요한 곳이라 인식하는 것은 나완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그 무엇 하나 남을 것 같지도 않은 일이기 때문에 꺼려지는 것이라 짐작한다.

뭐 당신이나 나나 "돈도 안 되는 일에 무슨?" 같은 마음이겠지. 

이건 참 슬픈 일이긴 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싶은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강요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 일을 위한 당신의 희생은 희생이라 여겨지지도 않을 것이며,

그에 따른 보상은 당연히 없을 것이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 그뿐이다.


Posted by narapark :

삭제된 이야기.

2014. 2. 21. 16:55 from 숨, 고르기.

좋은 삶을 고민할 때, 나는 말 하고 싶지 않았던 부분이 있었다. 

의도적으로 삭제된 개념. 바로 '보다 나은 삶'에 대한 이야기다. 

불편한 이야기다. '좋은 삶'이 아니라 '보다 나은 삶'이라니.


돌이켜보면 '좋은 삶'을 말 할 때, 내가 하고 싶던 이야기는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결정된 결론에 닿을 수밖에 없는 삶이 아닌, 만들어갈 수 있는 혹은 변화시킬 수 있는 삶, 그런 이야기.

진부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겠지만 어쩔 수 없다. 이야기로만 끝나버리게 내버려 둘 수 없다.


삶이란 명사적 의미로서 다뤄질 것이 아니라 동사적 의미로서 다뤄질 때 그 빛을 발한다. 

살아온 날들이 살아갈 날들에 의해 변화할 가능성을 가진 삶은 명사로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시작되었고,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삶'. 

결국 그 무엇도 결정되어있지 않고, 무엇을 하든 어떻게든 변화할 수 있는 그런 '삶'


때문에 '좋은 삶'에 선행하는 '삶' 이란. 충분한 아니, 넘치는 가능성의 토대에 놓여야만 한다.

너의 삶과 나의 삶이 비교될 수 없는, '보다 나은 삶'의 지평에서 이야기될 수 없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삶'이 가능성의 토대에 놓일 때, 너의 삶과 나의 삶은 비교 대상이 아니라 '마주보는 삶'이 될 수 있다.


마주보는 삶은 불완전함을 완전함으로 이끈다. 

단절된 존재, 유한의 존재인 객체로서의 인간을 연결된 존재, 무한의 존재인 주체로서의 인간으로 이끈다.

비로서 인간은 주체로서의 자신만의 삶을 살아 갈 수 있으며, 종국에는 죽음마저도 반길 수 있게 된다. 

이게 바로 '좋은 삶'이 가진 가능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은 취업이 꿈이 되고, 부자되는 것이 덕담이 되어버린 이 미친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좋은 삶'보다 '보다 나은 삶'이 더 현실감 있게 들릴 수 있다.

생존을 위한 삶은 경쟁할 수밖에 없는 구조 안에 놓인다. 그것이 타인이든 어떤 조직이든 마찬가지다.

이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의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생존은 쟁취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 '좋은 삶'은 찾아 볼 수 없다. 끝임없이 비교될 뿐이다. 


분명한건 삶이 생존에 기대어 있긴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취업이 꿈이된 삶이란, 생존이 꿈이 된 삶과 다름없다. 

이는 자신의 색이 아니라 기성화된 색을 입히는 행위로써

말하지면 삶의 한 도구인 취업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에 불과하다. 


나는 다만, 나는 살아남고 싶은게 아니라 살아있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너의 삶을 마주보고 싶다.


Posted by narapark :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삶이 흘러가는 것을 두고 보는 일은 일로써의 가치가 없다. 

무책임함을 의도적으로 숨기려는 수작에 불과할 뿐이다. 


잘 봐, 내가 사는 모습이 네 성에 차지 않을지 몰라도 마지막엔 

아니, 얼마 후엔 네 상상력이 전혀 닿지 못 한 걸 보게 될 테니까. 


같잖은 씨부림에 더 이상 웃음도 나지 않았다. 

이런식으로 진행되는 용원과의 만남은 끝이 좋지 않다.

둘 중 누구 하나가 정신을 잃어야만 했다.

언제나는 아니지만 용원과의 만남에서 정신을 잃는 건 희재였다. 

그게 편했다. 차라리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릴 떠들어대며

내가 이렇게 망가질 정도로 널 신뢰하고 있다고 이해되면 그만이었다.


내용이 중요했던 적은 없었다. 용원은 언제고 17년전 그 모습 그대로였다.

액면가는 좀 더 들어보였지만 막말로 생각하는 수준은 여전히 14살이었다.

누구에게나 강해보이고 싶어했고 주목받고 싶어했다.

용원은 남들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것을 좋아했다.

희재도 비슷했는데 자신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Posted by narapark :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많은 생각들을 읽다보면 나도 언제가는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를 하며 살아왔다. 고 우선 적어 둔다. 나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고 그래서 그 때부터 소설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누군가처럼 하루에 몇 권씩을 읽어 재끼거나 작법과 같은 학습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만의 첫 문장을 오래도록 기다리면서 문장들이 숨을 쉬는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만 키워왔다. 그러다 어쩌면 이런 막연한 기대와 기다림은 잘 못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래도 버릴 수 없는 어떤 욕심처럼 나만의 첫 문장을 기다리는 것은 그만 둘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느낌일까. 나는 일본 소설들처럼 눈 앞에 그려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할 만한 능력도 없거니와 대하 소설에 등장하는 여백과 치밀함을 표현해낼 자신도 없다. 아마 그래서 더욱 내 첫 문장을 기다리는 것으로 나름의 꿈을 선회시켜 안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많은 것들이 변화한다고 믿었던 것처럼 지금의 내 모습을 인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받아들이려는 노력 정도는 해볼 수 있는 것 아니냐는식의 자기 위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나는 가면을 공부했고 가면을 벗어 던지는 방법이 아니라 가면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해왔다. 애초에 가면이란 것이 개념상의 뜬구름이 아니라면 앞서 존재한 것이기 때문에 벗어 던지는 일 따위는 어디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는 네게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훈계하듯 자신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을거다. 그 언젠가는 마치 습관처럼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따위와 같은 대단해 보이지만 놀림감이 되기 딱 좋은 일들을 벌이기도 했을테니 말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더 이상 내게 매력적인 주제가 아니었고 오로지 마주함에 대한 열망만이 들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과도 과정도 중요하지 않았고 그 현상에만 집중했다. 그것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믿었고 나는 열심히 그 일에 참여 했다고 생각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적잖이 어리석은 짓이었다. 기록에서 누락된 과정과 결과, 현상에서 벗어난 관점은 나를 예상치 못한 심연으로 끌어들였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떤 꾸밈에 대해 결벽증적 태도를 보이곤 했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보여주기 위한 것에 불과하며 진실은 그 꾸밈 너머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네게 누구보다 솔직한 사람임을 증명하고 싶어했고, 나는 그 일을 꽤 잘 해냈다고 느꼈다. 그 누구도 인정해주지도 아니 애초에 관심조차 없었던 일이었지만 나는 그것이 내 일생의 과업인냥 행동했다. 분명 옳은 일이었고 좋은 일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한 그 무엇보다 자명했다. 

어느날 내 아버지가 내게 던진 한 마디의 말이 마음 한 켠에서 고개를 들었다.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괜찮다. 하지만 네 자신만은 속이지 마라. 아마 당시에 나는 이 말을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괜찮다. 하지만 네 자신에게만은 속지마라. 고 이해했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꾸밈에 대한 결벽증적 태도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너를 향해 있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에게 절대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으며, 어차피 내가 하는 일이란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는게 자연스러웠다. 나는 네게 속지 말하야 할 수동적인 입장에 선 사람이었으며 말했듯이 나는 내가 네게 얼마나 솔직한 사람인지를 매 순간 증명하려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어떤 우월감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 같다. 정신승리의 과정이었다고 말 할 수도 있겠다. 나는 어딘가에 높은 곳에 서서 이 땅을 굽어 살피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회상하면, 그땐 모두를 깔 볼 수 있었다. 모든 것이 하찮게 느껴졌고 실제로 그렇게 보였다. 나는 위대했고 모든 면에서 앞서 있었다. 나는 정말로 그랬다. 여기에는 과정도 없었고 결과도 없었다. 이에 대한 기록도 없었다. 단편 영화에서처럼 어떻게 시작됐는지 가늠하기 어려웠고 끝났을 땐 왜 끝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랬다. 나는 위대했다. 


나는, 내 취미는 사진을 찍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이다. 처음 필름 카메라를 만졌을 때 그 어느 때보다 설레었다. 나는 그 낯섦에 상기되었고 그래 이 정도면 내 취미라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나는 내게 어울리는 어떤 것을 찾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필름 카메라는 엄청난 유행이 되었고 심지어 그 구하기 힘들다는 주이코 렌즈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길을 나서면 열여 대여섯은 무슨 악세사리를 두른 것 마냥 카메라는 목에 메고 다녔고 그들 사이에는 고가의 디지털 카메라를 멘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었다. 

불편해졌다. 낯섦의 기억이 유행을 좇는 것으로 왜곡되는 것이 거북했고 참 싫었다. 자연스럽게 카메라는 먼지를 뒤집어 쓰기 일쑤였고 100일은 거뜬하게 버티는 베터리도 카메라를 사용 할 때마다 교체해야 하는 그런 상황까지도 연출되었다. 그러다보니 무심해진 것도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내 취미가 하나 사라져버리는가 싶기도 했다. 그나마 내가 쓰는 브랜드가 그 유행 대열에서도 떨어져나와 있어서 나름 다행이었다랄까.

돌아보면 너무나 유치하고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이지만 자존심의 문제일까 아무튼 그럼에도 나는 어떤 형식으로든 사진을 놓지는 않았다. 귀찮음에 사진에 대한 학습을 해본 적은 없다. 나는 그 무엇도 제대로 배워본적이 없는 것 같다. 사진도 대강 어깨너머로 익숙해졌을 뿐이다. 기계를 다루는 방식은 필요만 충족되면 어떻게든 익숙해졌다. 화각과 빛, 거리와 깊이에 대한 이야기는 강좌로 치면 한 학기로도 부족하겠지만 나는 그런건 모른다. 찍어서 이쁘고 찍어서 어울리면 그만이라. 이쁘고 어울리게 찍으면 나머지는 그 안에 다 있게 되있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새 카메라를 만났다. 


아주 먼 풍경을 바라보듯 삶을 관조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확실한건 그 만큼 나는 내 삶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것.  관조란 말은 참 멋있다. 어떻든 나는 모든 것을, 아니 적어도 내 삶에 관여된 것들 만큼은 충분히 조절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어휘들을 찾아 벽을 쌓고 자위했다. 흘러가는 시간은 어떻든 내 것이었고 텅 빈 마음도 어떻든 내 것이었다. 부정 할 수 없다. 의미를 새겨 넣는 일 따위 아무렴 어떤가 싶다가도 이내 흘러가버린, 텅 비어버린 시선을 마주할 때면 참 재미없구나 하고 슬퍼지기도 한다.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허탈함도 잠시, 어느샌가 나는 다시 무언가 되기를, 되어지기를 바란 건 아니었을까. 내가 서 있을 장소에, 정확히 그 자리에 서 있으려면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할까. 방법을 찾지 못 했다는 말로 다시금 얼굴을 가리려 하는 것일까. 어떻게든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어떻게든 무엇이든 써서 읽고 다시 읽어 누구에게든 보일 수 있는 자신감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한다. 결국 내보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어지지 않는다. 

모든 벽에는 문이 있기 마련이다. 자물쇠가 채워져 있든 아니든 문 없는 벽은 너무 슬프다. 하지만 문은 열지 않는한 벽과 다르지 않다. 벽은 넘어설 수 없는 것이며 넘어서지 말라는 경고다. 그러므로 문은 벽을 용서하는 수단. 이제는 조금이나마 쓸모 있는 어휘들로 손잡이를 만들어야겠다. 흘러가는 삶이 지루하다 말하기 전에 내 이름을 새겨 넣어야 겠다. 


알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래 이 얼마나 내뱉고 싶던 말이었던가. 꺼져 병신아. 알게 뭐람. 타인의 고통 쯤은 우리 서로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던가. 내가 네게 그렇고 네가 내게 그렇고. 그렇고 그런 사이. 우리는 우리이기 이전에 너와 나였다. 너와 나는 소리내 부르는 것 외엔 그 무엇도 닿을 수 없지 않던가. 서로를 포기하기엔 조금은 이른 시간이 아닐까 생각도 해봤지만 딱히 시간의 문제는 아니었던가 보다. 어차피 닿을 수 없는 나와 나이기에 언제고 간단한 몸짓 하나면 충분한 것이었다. 그건 그저 서로가 타인임을 확인하는 일 일뿐이므로. 


망각. 이 얼마나 손쉬운 관계이던가. 누군가 그랬다. 자신이 사진을 찍는 이유는 망각하기 위함이라고 기억하기 위함이 아닌 그 반대였다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왜 그 사람은 망각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고 말했을까. 생각해보면 답은 의외로 간단한다. 기억의 왜곡. 우리는 사실 우리의 기억들에 별로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 막연한 기대가 아무것도 가져다 주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기억은 사실 아무것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 그래서 망각이라는 말로 우리는 그렇게나 많은 것들을 포장하고 잃은 것을 잊었다고 애써 자위한다. 그건 축복이었다는 식의 의미를 부여해가면서 말이다. 

너와 내가 타인임을 확인하는 순간도 그 만큼 간단한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계획되지 않은 기억의 왜곡으로 나는 너를 내 편리에 맞춰 기억한다. 그리곤 그 뿐이다. 지금의 우리는 이런 관계에 놓여져 있다. 그것을 위한 사진은 말 그대로 망각을 위한 사진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단 하나의 프레임으로 기억되는 너. 이 얼마나 단순 명쾌한가. 이런 의미에서 사진은 도피라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견디기 힘든 기억으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도 어쩌면,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만큼 자신이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사진은 망각이라기보다는 관조다. 한 걸음 물러선 자리에 서 있고 싶은 마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사진은 동경이다. 그리고 타인이다. 어떤 작가는 이런식의 이야기를 남겼다. 피사체와 섞여들 수 있을때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들이 나를 받아 들일때 그때에야 비로소 카메라는 들었다는 식이다. 물론 무엇을 찍느냐에 따라 이런 관점은 적확한 답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런 관점은 곧 바로 폐기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바라본 누군가의 삶은 이질감을 갖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들과 동화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과 나, 라는 관계가 아니라 그들 중 하나라는 관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럴때 누군가의 삶이 나의 삶이 될 수 있다. 나의 삶을 사진으로 담으면 그 사진은 그만큼 많은 공감과 감동을 불러올 수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어설픈 동질감의 표출은 기만이다. 자기 기만일 수도 있고 더 적극적으로는 타인에 대한 기만이기도 하다. 결정적으로 나는 이 위태한 줄타기에 끼여들 생각이 없다. 나는 공감과 기만의 사이를 걷고 싶은 생각이 없다. 아무렴 어떨까 싶지만 어쩌면 여기엔 누군가의 입을 빌려 공감감의 결여라는 이유를 댈 수도 있겠다. 

물러섬, 다르게 보기, 이러한 행위가 공감감의 결여에서 온 것이라면 차라리 축복이라 생각한다. 사물의 본질을 꽤뚫자는 의미가 아니다. 지극히 단순한 의미에서의 물러섦이다. 사물의 본질 따위야 어찌되는 상관없다. 피사체는 거기 그대로 있는 것이다. 망각을 위해 사진을 찍는 사람이 기억의 왜곡을 창조한다면 관조는 있음을 기록한다. 피사체와 프레임 그리고 나, 이 어찌할 수 없는 거리감이 나를 안도하게 만든다. 부정될 수 없는 명제로 그곳에 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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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래 이 얼마나 내뱉고 싶던 말이었던가. 꺼져 병신아. 알게 뭐람. 타인의 고통 쯤은 우리 서로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던가. 내가 네게 그렇고 네가 내게 그렇고. 그렇고 그런 사이. 우리는 우리이기 이전에 너와 나였다. 너와 나는 소리내 부르는 것 외엔 그 무엇도 닿을 수 없지 않던가. 서로를 포기하기엔 조금은 이른 시간이 아닐까 생각도 해봤지만 딱히 시간의 문제는 아니었던가 보다. 어차피 닿을 수 없는 나와 나이기에 언제고 간단한 몸짓 하나면 충분한 것이었다. 그건 그저 서로가 타인임을 확인하는 일 일뿐이므로. 



Posted by narapark :

2013. 8. 30. 11:30 from 그런, 느낌.




욺.

Posted by narapark :





아주 먼 풍경을 바라보듯 삶을 관조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확실한건 그 만큼 나는 내 삶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것.  관조란 말은 참 멋있다. 어떻든 나는 모든 것을, 아니 적어도 내 삶에 관여된 것들 만큼은 충분히 조절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어휘들을 찾아 벽을 쌓고 자위했다. 흘러가는 시간은 어떻든 내 것이었고 텅 빈 마음도 어떻든 내 것이었다. 부정 할 수 없다. 의미를 새겨 넣는 일 따위 아무렴 어떤가 싶다가도 이내 흘러가버린, 텅 비어버린 시선을 마주할 때면 참 재미없구나 하고 슬퍼지기도 한다.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허탈함도 잠시, 어느샌가 나는 다시 무언가 되기를, 되어지기를 바란 건 아니었을까. 내가 서 있을 장소에, 정확히 그 자리에 서 있으려면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할까. 방법을 찾지 못 했다는 말로 다시금 얼굴을 가리려 하는 것일까. 어떻게든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어떻게든 무엇이든 써서 읽고 다시 읽어 누구에게든 보일 수 있는 자신감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한다. 결국 내보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어지지 않는다. 

모든 벽에는 문이 있기 마련이다. 자물쇠가 채워져 있든 아니든 문 없는 벽은 너무 슬프다. 하지만 문은 열지 않는한 벽과 다르지 않다. 벽은 넘어설 수 없는 것이며 넘어서지 말라는 경고다. 그러므로 문은 벽을 용서하는 수단. 이제는 조금이나마 쓸모 있는 어휘들로 손잡이를 만들어야겠다. 흘러가는 삶이 지루하다 말하기 전에 내 이름을 새겨 넣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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