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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5.18 눈물
  2. 2009.05.16 만남 - 그녀
  3. 2009.04.26 만남 1
  4. 2009.01.01 문제의식. 4
  5. 2008.10.27 우리의 자유

눈물

2009. 5. 18. 20:32 from 없는, 글.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닮은 것들을 찾아냈었다. 꽤 오랜 시간 함께했기 때문에 닮아온 부분이 아니라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우리는 말도 안 되는 공통점들을 찾아냈다. 서로의 이름에 받침이 없다는 것.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4자리나 일치한다는 것. 즉흥적인 일을 벌이는 것. 아메리카노만 마신다는 것. 비가 오면 동동주에 파전을 먹어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눈물에 약하다는 것. 그랬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눈물에 약했다. 작은 싸움은 서로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기 때문에 큰 싸움으로 번진 것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는 애써 눈물을 참아가며 스스로를 보호했다.

예상치 못한 네 눈물은 이제 막 열리려던 내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 입뿐만 아니라 생각마저도 멈추게 만들었다. 나는 네가 눈물을 흘릴 때면 내 존재가 너무나 하찮게 느껴져 괴로웠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비참해, 그래서 힘들었다. 그리고 그 때 역시 네 눈물이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면서, 네 눈물이 흐르는 것을 애써 모르는 척했지만,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댔던 것으로 기억한다. 생각해보니 네 볼을 타고 흐르는 그 눈물을 너는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너는 그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무엇이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을까. 사실 지금에 와서도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예상하기로는 스스로가 비참해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어쩌면 너는 그 때의 그 상황이 슬펐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불편했다는 기억만 오래 간직 할 정도로 힘든 날이었지만 말이다. 순간, 네 귀가 빨갛게 달아오른다. 아마 눈물이 흘렀다는 걸 알게 된 것이리라. 꺽어 질 듯 고개를 숙인 너는 아무 말 없이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커피스틱은 빨대가 아니라며 양손으로 컵을 들어 마시던 네가 그 커피스틱을 빨대로 사용하면서 말이다. 어...? 네 손에 반지가 없다.

재떨이의 담배연기도, 네 아메리카노에서도 더 이상 연기가 나지 않는다. 유일하게 움직이던 네 눈물도 말라버린 지금. 길거리에서 들려오던 소란스런 소리마저, 모든 게 멈춰버렸다. 혼란스러웠다. 나는 이 모든 상황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나자는 연락을 받은 그 순간부터 네가 눈물을 보인 그 순간까지 나는 이 상황, 조금은 힘들긴 해도 어렵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아니다. 이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갑작스런 혼란은 나를 짓눌렀다. 생각이고 뭐고, 난 그렇게 멈춰서 있었다. 네가 화장실을 가기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흔들지 않았다면 어쩌면 나는 그대로 계속 멈춰서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담배를 물었다. 이렇게 피워대다간 당장 내일이라도 죽어버릴 것만 같았지만 할 수 없었다. 손이 떨려와 세 번이나 라이터를 놓치고 나서야 불을 붙였다.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기분, 이건 정말 아니다. 있을 수 없는 일. 있어선 안 되는 일. 어느 때보다, 담배연기를 깊이 들여 마신다. 더, 더 깊이... 연기를 내뱉을 때 다 함께 쓸려나가게 제발. 부탁한다.

너는 한참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화장을 고친 걸까 아까보다 환해진 얼굴, 이제 만족하는 걸까. 자리에 앉자마자 너는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인다. 그 사진, 내가 처음으로 찍어준 사진이다. 장롱에 있던 필름카메라를 고쳐 처음으로 찍은 사진. 필름 한통에서 유일하게 건진 한 장, 프레임 안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네 얼굴. 내민 사진 뒤로 보이는 장난치듯 웃고 있는 너.

“이건 도저히 못 버리겠더라...”

Posted by narapark :

만남 - 그녀

2009. 5. 16. 01:23 from 없는, 글.

 

모든 것은 한순간에 변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을 깨닫는 것은 한순간이다. 난 그와의 인연이 다해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왜 같은 사람이 어느 날 전혀 다른 사람으로 나에게 다가오는가에 대한 문제다. 익숙했던 침묵은 불편해졌고 빛나던 우리도 더 이상 빛나지 않게 된다. 우리에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난 내가 그대로라고 생각했지만 그대로가 아니었고 그대로이길 바란 그대도 어느 순간 변해있더라.


아직 쌀쌀하지만 조금씩 따듯해져가는 그 즈음이었다. 겨울 외투들이 하나 둘 옷장으로 기어들어가고 새로 꺼낸 화사한 색들의 옷이 어울리는 그런 날. 하지만 그런 따듯함이 나에게는 그저 답답한 공기로만 느껴지는 그런 날. 우리는 카페테라스에 앉아있었다. 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지만 좀 추웠다. 난 더운 건 잘 참지만 추운 건 못 참는데, 그런 일을 신경 써 자리 잡을 만큼 나는 제정신은 아니었던 듯싶다. 가슴은 답답하고 앞에 앉은 남자도 답답하고 불편해서 우리의 과거마저 그렇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남자, 나랑 비슷하게 느끼고 있나보다. 연신 담배만 피워대는걸 보니, 날 질식시켜 죽일 셈인가보다.

얼마 전 우리는 전화통화를 통해 이별을 말했다. 그리고 서로 받아드리는 듯해 보였다. 사실 얼굴을 보지 않고 상대가 어떻게 느끼는지 알 수 있겠느냐만, 그냥 그도 그럴 것 같이 생각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별에도 의식은 필요하다.

누구나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대화를 하고 있는 시간보다는 대화 없이 마주한 시간에 머리는 빠르게 돌아간다. 그간 함께했던 시간이 필름처럼 지나가다가 감정들이 지나간다. 우린 분명 사랑했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었겠는가,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이 남자, 그 때 그 남자 맞나 싶은 순간이 온다. 그렇게 우리의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갈 때 난 모든 허무 속에서 내 과거를 잃지 않기 위해 움켜쥔다. 그리고 내 앞에 과거이자 과거가 될 현재가 앉아있다. 우리는 마주 하지만 서로를 응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나눈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 같아 슬프다.

나는 변화가 싫다. 무언가 변해서 이전의 것이 사라지는 것이 싫다. 조금씩 변한 그대도 싫고, 변한다고 느끼는 나도 싫었다. 그런 참을 수 없는 마음은 끝내 행위로 나타나, 나는 쇼핑을 하고 치장을 한다. 변화가 싫어서 나에게 변화를 주다니, 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우스운가.

우리의 모든 시작이 끝을 동반한다는 것은 모르는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찬란한 시작은 그 사실마저 망각하게 할 만큼 매력적이다. 그리고 누구나 대부분 비슷하게 저지르는 실수를 범한다. 나 역시 그중 하나다. 끝없이 반짝이기를 원했고 늘 특별하기를 원했다. 내 앞에 앉은 이 남자가 나에게 보여준, 아니 그는 보여주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봐버린 그 모습을 계속해서 강요하고, 다른 모습을 봄으로 내 사랑이 끝날까 두려웠다. 다시 한 번 물어야겠다. 내가 한 것은 사랑이었을까?

그가 일곱 번째 담배를 입에 문다. 그도 나와 비슷할까?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우리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겠지. 다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디부터 말해야 할까. 말할 수 있을까? 나와의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다. 그리고 슬프다. 너무나 익숙했던 모든 것이 낯설어버리는 지금이 너무너무 슬프다.




written by. 신아



Posted by narapark :

만남

2009. 4. 26. 21:34 from 없는, 글.

 

아마 그날에도 오늘처럼 비가 내리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그건 비가 아니라 단지 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조각난 기억을 애써 되돌리자면 이렇듯 무리한 상상이 따라 오기 마련이다. 아무튼 그 날에 비가 왔든지 오지 않았던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건 그 날은 우리가 더 이상 우리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는 날이었다는 것이다.

너는 짧게 자른 머리를 하고 와서는 아메리카노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너를 바라보다 연신 담배만 피워댔던가보다, 아직 날이 덜 풀려 목도리를 해야 했음에도 우리는 사람들이 내려다 보이는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그 자리가 예전 우리 처음 만나 쉴 줄 모르고 떠들어 대던 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묘하게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달라진 건 마주앉은 너는 더 이상 내 입을 보지 않았고, 나 또한 더 이상 네 눈을 보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사실 우리는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지금 내가 왜 이 자리에 앉아 있는지 나는 도저히 납득 할 수 없었다. 얼마 전 통화에서 우리는 분명, 끝. 이라 했었다. 오랜 시간 서로에게 지쳤던 까닭일까, 너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담담히 받아 들였다. 그런데 왜 지금 나는 여기 앉아 네 아메리카노에서 피어오르는 김 따위나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도저히 납득 할 수 없는 일이다. 벌써 몇 대째 일까. 비좁은 재떨이가 안쓰러워 보일 무렵 나는 처음으로 네 눈을 쳐다봤다. 어째서 일까 처음 만났을 때와 다름없어 보이는 네 눈 속에 낯설게만 느껴지는 나는, 어딘가 잘 못 된 것일까. 아니 정말 잘 못 되어 있기나 한 걸까. 도대체 우리는 뭐였을까. 사랑....이었을까.

그러고 보니 너는 머리만 바뀐게 아니었다. 귀걸이며, 시계며, 반지며... 내가 눈치 채지 못했던 걸지는 몰라도 여지껏 너를 보아오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들뿐이다. 어떤 결심 같은 것일까. 너에게 이전의 나는 더 이상 없다라는? 스스로에 대한 다짐을 받은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잠겨 나는 다시 네 아메리카노나 들여다본다. 생각해보니 참 우습다. 우리가 이렇게 말없이 앉아 있는 시간은 참 많았는데, 오늘만큼 불편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정말 하나도 몰랐지만 괜찮다 생각했을 뿐, 어쩌면 너는 나와는 다르게 내가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건 너의 착각이었겠지. 그리고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긴 나는 그냥 그것으로 괜찮다고 생각해 내버려 둔 것이 오늘에 이르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숨이 멈출 듯 갑갑해왔다. 결국 한 대 더 불을 붙였다. 그렇다. 그런 식의 내버려둠이 네게 오해가 쌓이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지난번 통화에서 5년이 넘게 만난 나에게 도저히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는 너의 말은 아마 그런 의미였으리라. 너에게 나는 내가 아니라 네 환상 속에 누군가였을 것이다.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네 환상속의 누군가와 내가 다르다는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해 할 수 없는 건 아마 내가 아니라 너였을 것이다. 네가 아는 나는 내가 아니라 네 환상 속에 누군가였으므로 아마 엄청난 혼란 속에 살아왔을 게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네 눈앞에 있는 나란 녀석은 별것 아닌 그저 길에 흘러 넘쳐나는 그런 세금벌레 같은 인간이었을 뿐, 네 환상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었을 테다. 미안해진다. 내가 나를 보여줌에 소홀했었고, 만남 속에서도 나는 네게 좋은 사람이고 싶었던 것뿐이었지만 결과적으론 너는 내가 아닌 누군가와 만나고, 이야기하고 그러 했던 것이다. 그렇게 내가 만들었던 것, 그래, 그래서 미안해진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바로 이때부터 들기 시작했다. 비좁은 재떨이에 담배를 우겨 넣고 마지막 연기를 내뱉으면서 다시 네 눈을 쳐다보았다. 이럴수가, 너는 울고 있었다.


Posted by narapark :

문제의식.

2009. 1. 1. 16:21 from 없는, 글.
논문을 준비 하면서 아직 글 한 줄도 쓰지 못하는 이유는 문제의식이 너무나 희미하다는 것이다.
분명한 건, 데카르트와 신. 
나의 문제의식이라고 할 때는, 내게 문제되는 부분을 다뤄야 하는게 아닌가. 결국 나와 신의 관계. 어쩌면 나는 이 부분에 가장 큰 주안점을 두어야 할 듯 싶다. 인간 관계론에서부터 시작하여 수 많은 관계로 구성되는 우리의 삶까지 그래서 종교를 믿게되는 과정과 그것으로 얻게 되는 자기 만족, 인간(나)과 신의 관계를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과 그의 신앙에서 찾는 이유는 그가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스스로 원했던지 원하지 않았던지 무신론의 발판을 열었기 때문이고 더불어 그에 대한 변증의 발판을 만들고 싶기 때문일 것이라 예상한다. 더 연구를 해봐야 알겠지만 분명 그 당시 데카르트는 무신론자가 아니었음에도 'Cogito'라는 개념의 시작을 알렸다는 이유로 종교계에서 비판을 받아 왔다. 그야 물론 중세가 막을 내리게된 시대적 배경 또한 무시할 수 없지만, 'Cogito' 때문에 신이 무시된 이론은 아니라는 것을 종교계가 납득 할 수 있는 변증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데카르트의 'Cogito'라는 개념은 김상봉이 말한 주체성의 이념과도 맥을 같이 한다고 생각하면 비약적인 것일까. 나는 그 관계를 해명하여 자아 주체성이 관계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설명할 것이다. 이 관계 해명은  사람들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현대 사회에서 올바른 관계가 무엇인지를 밝힌 초석이 될 것이며 현재의 인간관계가 잘 못되었다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관계가 잘 못 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의 대표적인 예로 김상봉이 저술한 『학벌사회』를 들 수 있으며, 우석훈의『88만원 세대』또한 마찬가지라 볼 수 있다.
선행연구로, 데카르트와 하나님의 관계에서 'Cogito'는 데카르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어떻게 control(마땅한 말을 못찼겠다.. 이놈의 어휘...단, 억제의 의미는 배제한다.)했는지를 밝혀야 한다. 그러나 현재로써 찾을 수 있는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어쩌면 새로운 해석에 기대어야 할 부분일지도 모른다. 이 연구를 위해 필요한 자료로 데카르트의 개인적인,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는, 편지라던지 일기와 같은 것들이 필요한데 현재까지 찾은 자료 중엔 없다. 영어를 마스터 해야 하는 이유 또한 이것에 기인한다. 국내 연구자료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지만 국외, 그것도 미국에서 발표된 자료는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많다. 어쩌면 프랑스자체 보다 더 말이다.

그럼 결국 내가 이 연구를 위해 그것도 선행 연구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 영어와 프랑스어 그리고 가능하다면 라틴어까지라는 것이 된다. 


아직 한글도 어려운데.....
Posted by narapark :

우리의 자유

2008. 10. 27. 05:39 from 없는, 글.


자유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오늘날처럼 개인의 권리가 존중받는 사회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본래 자유라는 말은 동양에서는 그리 좋은 뜻의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의(義)나 예(禮)와 같은 기본 덕목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저 자유라는 것은 방종과도 같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정도의 의미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양의 사상이 도입되면서 Freedom이랄지 Liberty와 같은 언어를 번역해야 하다 보니 기존에 있던 자유라는 말의 의미에 변화를 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유교의 사상인 의(義)가 접목된 현재의 자유라는 말은 책임감 있는 개인에게 보장되는 어느 정도 한정된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 불의한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 또한 자유겠지만 반대로 타인을 억압하지 못하게 작용하는 것 또한 자유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유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유는 당신을 떠나는 자유가 포함된 자유이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움직이고 자유롭게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는 말이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자유의지라는 것은 스스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해도 어떤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 한다는 것인데 나는 사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그런 자유는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는 말이다. 아니, 조금 더 생각해서 이렇게 질문해보자. ‘당신은 하나님을 떠날 생각이 있습니까?’ 이 질문은 그 ‘당신’은 이미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없다. 물론 논리적인 이야기 한에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제를 참으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은 그 처음에 내 의지, 즉 내 자유로 결정내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결정하셨고 이끌어 오신 것이지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그 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 자유의지가 침해 받은 것은 아닌가? 이번엔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자. 당신은 지금 당신이 선택했든지 안했든지 학생이다. 당신은 학생이기 때문에 당신의 자유를 침해받고 있다. 당신은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싶은데 학생이기 때문에 과제를 해야 한다던가 수업을 들어야 한다던가 말이다. 가끔은 불평도 하지만 당신은 그 놀고 싶다는 자유를 침해 받았다고 해서 학생이기를 그만두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장에 하고 싶은 것을 했을 때 얻게 되는 이익과 자유는 침해받았지만 그래도 그것을 했을 때 얻게 되는 이익을 비교해보면 후자가 훨씬 낫다는 것을 당신은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것은 사실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 그리고 당신은 더 이익이 되는 쪽으로 선택함으로 자유를 버린다. 선택이란 뭔가를 하나 고르는 것이 아니라 뭔가 하나를 버리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말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자유를 포기함으로써 자유를 얻게 된다. 둘 다 같은 자유이지만 이익의 차이에서 다른 자유가 된다. 그래서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말은 자유롭기 위해서는 또 다른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당신이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가지는 자유와 함께 있지 못할 때 가지는 자유는 어떠한가?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당신에게는 하나님을 떠날 선택의 자유가 없다. 그래서 못마땅한가?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이다. 당신의 자유가 박탈당한 만큼 아니 그것과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의 더 큰 이익을 가져다줄 자유가 당신 눈앞에 있고 당신에겐 그것을 즐길 자유가 있다.


 

Posted by narapar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