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2009. 4. 26. 21:34 from 없는, 글.

 

아마 그날에도 오늘처럼 비가 내리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그건 비가 아니라 단지 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조각난 기억을 애써 되돌리자면 이렇듯 무리한 상상이 따라 오기 마련이다. 아무튼 그 날에 비가 왔든지 오지 않았던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건 그 날은 우리가 더 이상 우리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는 날이었다는 것이다.

너는 짧게 자른 머리를 하고 와서는 아메리카노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너를 바라보다 연신 담배만 피워댔던가보다, 아직 날이 덜 풀려 목도리를 해야 했음에도 우리는 사람들이 내려다 보이는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그 자리가 예전 우리 처음 만나 쉴 줄 모르고 떠들어 대던 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묘하게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달라진 건 마주앉은 너는 더 이상 내 입을 보지 않았고, 나 또한 더 이상 네 눈을 보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사실 우리는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지금 내가 왜 이 자리에 앉아 있는지 나는 도저히 납득 할 수 없었다. 얼마 전 통화에서 우리는 분명, 끝. 이라 했었다. 오랜 시간 서로에게 지쳤던 까닭일까, 너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담담히 받아 들였다. 그런데 왜 지금 나는 여기 앉아 네 아메리카노에서 피어오르는 김 따위나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도저히 납득 할 수 없는 일이다. 벌써 몇 대째 일까. 비좁은 재떨이가 안쓰러워 보일 무렵 나는 처음으로 네 눈을 쳐다봤다. 어째서 일까 처음 만났을 때와 다름없어 보이는 네 눈 속에 낯설게만 느껴지는 나는, 어딘가 잘 못 된 것일까. 아니 정말 잘 못 되어 있기나 한 걸까. 도대체 우리는 뭐였을까. 사랑....이었을까.

그러고 보니 너는 머리만 바뀐게 아니었다. 귀걸이며, 시계며, 반지며... 내가 눈치 채지 못했던 걸지는 몰라도 여지껏 너를 보아오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들뿐이다. 어떤 결심 같은 것일까. 너에게 이전의 나는 더 이상 없다라는? 스스로에 대한 다짐을 받은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잠겨 나는 다시 네 아메리카노나 들여다본다. 생각해보니 참 우습다. 우리가 이렇게 말없이 앉아 있는 시간은 참 많았는데, 오늘만큼 불편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정말 하나도 몰랐지만 괜찮다 생각했을 뿐, 어쩌면 너는 나와는 다르게 내가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건 너의 착각이었겠지. 그리고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긴 나는 그냥 그것으로 괜찮다고 생각해 내버려 둔 것이 오늘에 이르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숨이 멈출 듯 갑갑해왔다. 결국 한 대 더 불을 붙였다. 그렇다. 그런 식의 내버려둠이 네게 오해가 쌓이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지난번 통화에서 5년이 넘게 만난 나에게 도저히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는 너의 말은 아마 그런 의미였으리라. 너에게 나는 내가 아니라 네 환상 속에 누군가였을 것이다.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네 환상속의 누군가와 내가 다르다는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해 할 수 없는 건 아마 내가 아니라 너였을 것이다. 네가 아는 나는 내가 아니라 네 환상 속에 누군가였으므로 아마 엄청난 혼란 속에 살아왔을 게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네 눈앞에 있는 나란 녀석은 별것 아닌 그저 길에 흘러 넘쳐나는 그런 세금벌레 같은 인간이었을 뿐, 네 환상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었을 테다. 미안해진다. 내가 나를 보여줌에 소홀했었고, 만남 속에서도 나는 네게 좋은 사람이고 싶었던 것뿐이었지만 결과적으론 너는 내가 아닌 누군가와 만나고, 이야기하고 그러 했던 것이다. 그렇게 내가 만들었던 것, 그래, 그래서 미안해진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바로 이때부터 들기 시작했다. 비좁은 재떨이에 담배를 우겨 넣고 마지막 연기를 내뱉으면서 다시 네 눈을 쳐다보았다. 이럴수가, 너는 울고 있었다.


Posted by narapar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