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이 익는 문구는 항상 누군가에 의해 먼저, 더 깊은 의미로 쓰여졌다.
아무말도, 아무것도.
그렇게 세상엔 많은 글들이 떠돌아 다닌다.
처음의 의미와는 다르게, 정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은채.
변하지 않는 것만이 진정한 진리라고, 그것이 진짜라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절대 변하지 말아야할 무엇이 있어야만 한다고,
어쩌면, 알 수 없는 희망같은 걸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은 변한다.
그저 계절이 바뀌듯, 비가 그쳐버리듯, 순간 아침이 밝아오듯,
세상은 너무나 쉽게, 어느 순간 변해버린다.
무엇인가 나비효과마냥, 1984년을 1Q84년으로 만들어버리듯.
같은 시간에 공간이 분할된다.
아무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고 싶지도, 해야할 당위도 없다.
이건 오직 나만을 위한, 이기임에 틀림없다.
내가 죽겠는데, 누굴 신경쓰겠느냐던, 누군가의 푸념처럼.
나는 내 감정에 솔직해진 걸까라는 어설픈 고독을 흉내내본다.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어제로 몰아 넣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나를 더 던져야 겠다고. 무언가를 더 해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면, 그 방향이 잘 못된것은 아닐까?
아니,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잘 못된 것은 아니었을까.
습관처럼 굳어진 행동양식에 어긋나는 것들을 이해하지 못 하는 건.
분명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것이 두려운게 아니라 정말 이해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그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사람은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생각했던 것 부터 오류였다.
사람은 결코 이성적인 동물이 아니다.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쿨한게 없듯이, 이성적인 척, 하는 것 뿐이다.
생각..?
생각하는 것과 이성적이라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그래서 판단하고 개념을 갖는 것.
그런 후에 그 개념에 따른 행동을 할 때.
그 순간에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이성적인가, 감각적인가이다.
착각은 개념을 갖을 때 발생하고 오해는 판단을 내릴때 생겨난다.
사실, 아무말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건 없다. 말 장난이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 처럼.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가 현실을 1Q84년으로 인식하는 행위처럼.
그냥, 모르겠는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