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제된 이야기.
좋은 삶을 고민할 때, 나는 말 하고 싶지 않았던 부분이 있었다.
의도적으로 삭제된 개념. 바로 '보다 나은 삶'에 대한 이야기다.
불편한 이야기다. '좋은 삶'이 아니라 '보다 나은 삶'이라니.
돌이켜보면 '좋은 삶'을 말 할 때, 내가 하고 싶던 이야기는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결정된 결론에 닿을 수밖에 없는 삶이 아닌, 만들어갈 수 있는 혹은 변화시킬 수 있는 삶, 그런 이야기.
진부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겠지만 어쩔 수 없다. 이야기로만 끝나버리게 내버려 둘 수 없다.
삶이란 명사적 의미로서 다뤄질 것이 아니라 동사적 의미로서 다뤄질 때 그 빛을 발한다.
살아온 날들이 살아갈 날들에 의해 변화할 가능성을 가진 삶은 명사로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시작되었고,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삶'.
결국 그 무엇도 결정되어있지 않고, 무엇을 하든 어떻게든 변화할 수 있는 그런 '삶'
때문에 '좋은 삶'에 선행하는 '삶' 이란. 충분한 아니, 넘치는 가능성의 토대에 놓여야만 한다.
너의 삶과 나의 삶이 비교될 수 없는, '보다 나은 삶'의 지평에서 이야기될 수 없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삶'이 가능성의 토대에 놓일 때, 너의 삶과 나의 삶은 비교 대상이 아니라 '마주보는 삶'이 될 수 있다.
마주보는 삶은 불완전함을 완전함으로 이끈다.
단절된 존재, 유한의 존재인 객체로서의 인간을 연결된 존재, 무한의 존재인 주체로서의 인간으로 이끈다.
비로서 인간은 주체로서의 자신만의 삶을 살아 갈 수 있으며, 종국에는 죽음마저도 반길 수 있게 된다.
이게 바로 '좋은 삶'이 가진 가능태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은 취업이 꿈이 되고, 부자되는 것이 덕담이 되어버린 이 미친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좋은 삶'보다 '보다 나은 삶'이 더 현실감 있게 들릴 수 있다.
생존을 위한 삶은 경쟁할 수밖에 없는 구조 안에 놓인다. 그것이 타인이든 어떤 조직이든 마찬가지다.
이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의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생존은 쟁취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 '좋은 삶'은 찾아 볼 수 없다. 끝임없이 비교될 뿐이다.
분명한건 삶이 생존에 기대어 있긴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취업이 꿈이된 삶이란, 생존이 꿈이 된 삶과 다름없다.
이는 자신의 색이 아니라 기성화된 색을 입히는 행위로써
말하지면 삶의 한 도구인 취업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에 불과하다.
나는 다만, 나는 살아남고 싶은게 아니라 살아있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너의 삶을 마주보고 싶다.